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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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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고 사망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 '나눔과 나눔'에서 [안녕 아빠]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존엄한 삶과 죽음을 위한 활동을 해온 분이 쓰신 글이라 담백하고 진정성 있게 다가옵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blog.naver.com/hopenana/222129282638

 

책소개_ <안녕 아빠 :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

​2년전 가을. '들리는 사진관, 영정사진 프로젝트' 라는 전시가 있었습니다. ‘사후에 어떠한 ...

blog.naver.com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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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안내 코너에 [안녕 아빠 -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어떤 기사를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한해에 7만종 이상의 신간이 쏟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런 가운데 제 책이 이렇게 기사화되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

 

(사진 : 도서출판 학고재)

▲안녕 아빠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 같은 자식이라도 맏딸의 입장과 아들의 태도는 또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부재로 세상에 남은 세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안녕 아빠(학고재·1만5,000원)’는 대중 강연 전문가인 저자 오채원이 살아생전 살갑게 받들지 못한 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글로써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쓴 책이다. 누구라도 초보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장례에서 갑자기 상주가 된 젊은 자식으로서, 모쪼록 다른 이들은 당황스럽거나 멋쩍은 일을 덜 겪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저자는 임종으로 시작해 부고와 상조업체, 조문, 답례를 지나 유품 정리, 나아가 이후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간다.

* 출처 : 전북도민일보

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10859

 

출간 1주일만에, 예스24의 감성/가족에세이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8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 예스24 도서 구매 :

www.yes24.com/Product/Goods/92910332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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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이번에도 그럭저럭 퇴원하실 줄 알았다. 응급실에 실려 가신 게 벌써 여러 번. 몇 년 전에는 아예 병원 앞으로 이사를 했다. 젊은 날에 이미 목숨을 걸고 심장 수술을 했고 평생 동안 병치레가 잦으셨다. 그래서였을까? 언제부턴가 아빠가 입원을 하셨다는 말에도 무감각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아빠가 떠나버리셨다. "누룽지가 먹고 싶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안녕 아빠 - 울고 싶어도 울 틈이 없는 맏딸의 애도 일기] 표지. 출처 : 도서출판 학고재

 

미혼의 프리랜서 맏딸, 상주가 되다

저자 오채원은 무대에서 역사 이야기를 펼쳐 보이는 공연 진행자이자, 강단에서 소통의 각양각색을 이야기하는 대중 강연 전문가다. 그럼에도 정작 아버지와는 끝까지 편안하게 교감하지 못한 채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 다. 그렇게 서글픈 마음을 달래며 아버지를 애도하는 와중에,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맏이, 딸, 비혼 여성, 지식노동자'라는 정체성을 자각했다. 관혼상제의 일처리가 으레 그러하듯, 부친상의 상주가 된 맏딸의 마음에는 상실감 말고도 또 다른 상채기가 남았다. '네 위치가 여기'임을 알려주는 민망하고 적나라한 현실에 발끈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가장 큰 이유는 살아생전 살갑게 받들지 못한 아버지에게 뒤늦게나마 글로써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세상이 확인 해준 '프리랜서 비혼 맏딸'이라는 위치에서 스스로를 단단하게 북돋워 '삶'을 야무지게 일구기 위해, 그래서 장차 맞이할 너와 나, 모두의 '죽음'을 차분하게 준비하기 위해서다.

장례에 프로가 어디 있나요 ─ 초짜 상주를 위한 장례 매뉴얼

『안녕 아빠』를 쓰기 시작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누구라도 '초보'일 수밖에 없는 부모의 장례. 갑자기 상주가 된 젊은 자식으로서, 모쪼록 다른 이들은 당황스럽거나 멋쩍은 일을 덜 겪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종'으로 시작해 '부고'와 '상조업체’, '조문’, '답례'를 지나 '유품 정리', 나아가 '이후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글을 풀어나간 이유다. 저자의 방식대로 가볍게 설명하자면 『안녕 아빠』는 유용한 '장례 매뉴얼'인 셈이다. 그런 만큼 상주의 입장에서도, 또 조문하고 위로하는 입장에서도
마음에 새길 만한 현실적인 이야기가 착실하게 담겨 있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이 책의 힘은, 솔직하고 섬세한 말로 감정을 잘 골라 가족의 죽음 이후의 일상과 변화를 기록했다는 데 있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자식들. 같은 자식이라도 맏딸의 입장과 아들의 태도는 또 다를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부재로 세상에 남은 세 사람의 관계는 크게 달라진다.

상갓집도 사람 사는 집 ─ '산 사람'이 할 일들

일상처럼 병을 안고 사신 아버지이기에 세상 떠난 뒤의 대비도 웬만큼은 해두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유언은 없었고 사후 정리는커녕 당장 장례 준비도 된 게 없었다. 어느 죽음인들 황망하지 않겠느냐마는, '듬직하지 못해’ 미안한 맏딸은 온 정신 부여잡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장례를 치른다.
마흔줄이 넘었어도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뒷정리를 하는 일은 안 해본 일투성이다. 너나없이 쏟아놓는 훈수는 따갑거나 무겁기 일쑤고, 남의 경우와 내 경우가 다르니 고맙긴 해도 마땅치가 않다. 평생 주부로 살면서 완고한 아버지를 수발하다 혼자 남은 어머니, 그런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생활을 꾸리는 일도 조심스럽다.

건강하게 이별 하기 ─ 오늘도 여전히, 갈팡질팡 애도 중입니다

문제는 '애도’, 나의 마음이 제일 당혹스럽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해서 데면데면하던 마음이 갑자기 애틋해지지는 않는다. 뻣뻣하고 투박하던 관계, 정리되지 않는 원망과 미웠던 기억.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 고작 "누룽지가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긴 것마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다. 사는 내내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마음을 읽고 헤아리지 못했다. 미우면 밉다, 고우면 곱다 제대로 표현을 해본 기억도 별로 없다. 나쁜 아버지여서도 아니고, 못된 딸이어서도 아니다. 누군가는 잘해드리지 못한 걸 크게 후회 할 거라 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아버지가 살아 오신다 한들 전에 없이 살가운 딸로 바뀔 리도 없지 않은가. 아버지 생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그러했듯, 그 부재를 실감하고 애도하는 데서도 딸의 마음은 갈팡질팡 엇박자다.

아버지 부재 1년, 애도 1년의 기록

가족의 모양새도 분위기도 달라졌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버지 생전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나가서 밥줄을 챙기고, 아무 일 없는 듯 일에 몰두한다. 그러나 속사정은 다르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겪은 문제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마음은 분노와 비탄 사이를 오갔다. 시원스럽게 소리 내 우는 건 아직도 어색하다. ‘다들 그렇다'기에 그런 줄로만 알고 입 꾹 다물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더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째서 이렇게 애도가 자연스럽지 못한가. 다들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에 어떻게 원통한 속을 풀어내는지, 과연 그때의 후회와 다짐을 다져 남은 이들과 잘 살아가는지 궁금해진 저자는 스스로 이렇게 묻고 답했다. "나에게도, 가족에게도 정직하지 못했다. 난 아빠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동시에 미워했다. 나의 모든 불행이 아빠 탓이니까. 당신 자신이 가장 중요한 분이니까. (...) 이제야 알겠다. 나의 애도는 아직 시작조차 안 됐음을, 내 마음속 시계는 여전히 그날에 멈춰 있음을. 그래서 중요한 매듭을 짓지 못했음을, 아직도 아빠를 보내드리지 못했음을."
일기 쓰듯 속마음을 적어 내려 간 1년은 비로소 온전히 아버지 생각에 집중한 시간이었다. 소리 내 울 수 있었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애도임을 받아들인 지금, 이제야 아버지에게 "안녕"을 말한다.

저자 사진. 출처 : 차경

 

[저자 소개]

오채원
커뮤니케이션과 동양철학을 전공했다. ‘우리 옛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소통해왔는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역사 기록을 파고든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 속에서 의미 있는 메시지를 찾아 오늘의 언어와 방식으로 친절하게 풀어준다.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별칭으로 강의를 하고 칼럼을 쓰며, 스토리텔링 콘서트 무대에서 ‘세종 이야기꾼’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부쩍 생각이 많아졌다. 긴 시간 대중 앞에서 ‘소통’을 주제로 이야기해왔음에도 정작 아버지와는 끝까지 편안하게 교감하지 못한 채 이별했기 때문이다. 죽음과 애도 앞에서 맏이, 딸, 비혼 여성, 지식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다시 자각하며, 이제부터의 ‘삶’을 더욱 열심히 일구고 남아 있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기로 결심했다.

 

(본 글은 도서출판 학고재의 보도자료입니다.)

 

 

[구입처]

 

http://www.yes24.com/Product/Goods/92910332?OzSrank=1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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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입니다. 고 최숙현 선수를 애도하며 작성한 본 기사는 오마이뉴스 탑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a4w )

 

경주시청 팀 관계자들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에게 가한 상습적 가혹행위 사건이 연일 보도되며,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조직 차원 혹은 조직 내 권력자가 신체적·정신적 괴롭힘으로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행태는 그 뿌리가 깊은데요. 이에 조선시대에 기록된 직장 내 가혹 행위를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신속인을 괴롭히는 자는 모두 장 60대에 처한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刑典)'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의하면, '신속인(新屬人)'을 괴롭히는 자에게는 장 60대의 처벌이 내려집니다. 여기에서 신속인이란 무엇일까요? 조선시대에는 이 신속인 외에 신래(新來), 신참(新參), 신은(新恩), 신귀(新鬼) 등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바는 같습니다.
 

새로 과거에 합격하거나, 선비로서 처음으로 벼슬을 얻은 자를 신래라 한다. (명종실록 8년 윤3월 11일)

 
신속인·신래·신참·신은·신귀 등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모두 '신입'에 해당합니다. 선진(先進) 곧 선배는 허참례(참여를 허락하는 의식), 면신례(신참을 면하는 의식), 면신벌례(신참을 면하려 한 턱 내는 의식) 등의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신입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심지어 한 자리에 함께 앉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집단 따돌림은 한 달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기에 신래는 굴복하고 신고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고식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참으로 고약했습니다.
 

사헌부(현재의 검찰·감사원)가 아뢰었다..."예문관(지금의 청와대 연설 비서관)의 신래가 된 자가 논밭과 주택 등 재산을 모두 팔아서 그 비용으로 쓰고 빚을 갚지 못하고 죽자, 과부가 된 그의 아내가 눈물로 일생을 보낸 경우도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시궁창의 오물을 (신래의) 얼굴에 칠하고는 당향분(현재의 명품 화장품)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갓과 의복을 찢고는 더러운 물속에 밀어 넣어 뒹굴게 하여, 사람이 차마 못 볼 귀신같은 형상을 만들어 몸을 상하게 하거나 병들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하니, 체면을 손상함이 실로 크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3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라 부르며 멋대로 학대하는데,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온 낯에 오물을 칠하며, 잔치를 벌이도록 독촉하여 먹고 마시기를 거리낌 없이 합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의 몸을 괴롭히는 등 갖가지 추태를 부리고, 아랫사람들을 매질하는데 그 맷독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생명을 잃거나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리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니 폐해가 또한 참혹합니다. 사대부들 사이에서 먼저 이런 풍습을 앞장섰기 때문에 변변치 않은 벼슬아치, 정1품에서 종9품 사이에 들어가지 않는 잡품, 군사, 노비와 같은 미천한 사람들까지도 모두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종실록 36년 12월 10일)

 
신래가 치러야 하는 신고식은 상류층·엘리트층은 물론 하층민에게까지 일반화되어, 사회에 끼치는 폐해가 대단했습니다. 한 개인이 감당해내기 힘든 규모와 내용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에 걸쳐 거하게 대접하라는 선배들의 요구에 응하느라, 가난한 사회 초년생과 그 가족은 빚을 끌어 쓰다 재산을 탕진하고 신세를 망치기도 합니다. 또한 오물을 뒤집어쓴 채 음담패설을 쏟아내거나 온종일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켜야 합니다.

소위 '기 꺾기'를 위해 가상적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신체적 죽음도 발생했는데요. 체벌 등의 신체적 가혹 행위로 인해 병을 얻거나 폐인이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임금의 명을 전하였다. "일전 경연에서 이조판서(현재의 행정안전부 장관) 허굉이 신래를 괴롭히는 폐단을 말하기에, 금지하도록 이미 법사(사법업무 담당 관청)에 거듭 밝혔다. 오늘 경연관(임금의 독서토론 담당 관리) 강현이 또한 '신래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리) 조한정이 괴롭힘을 당하다 기절하므로 떠메고 갔는데 죽었다'고 한다." (중종실록 21년 1월 24일)


위와 같이, 가혹 행위로 인해 목숨을 잃는 신래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신고식'은 '고풍(古風)', 즉 전통 혹은 관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후기까지 이어집니다.
 

우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이행이 아뢰었다..."신래를 괴롭히는 일을 잠시도 중지하지 않는데, 고풍이라고는 하나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사관(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은 청현직(학식·청렴·문벌·지위를 갖춘 엘리트코스)이어서 학부형들이 모두 바라는 바이지만, 피하려는 것은 잔치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워서입니다." (중종실록 24년 11월 5일)
 
사헌부가 아뢰었다..."신래를 닦달하는 일이 고풍이라고는 하지만, 예전에는 없던 일로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요직으로 가는 길목일수록 신고식의 강도가 더욱 높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임명되기를 피하기도 합니다. 신고식 때문에 뛰어난 인재도 사장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권마다 가혹한 신고식에 대해 엄한 단속을 천명하고 적발되면 처벌했지만 고풍이라는 이름으로 단절되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집니다. 심지어 임금의 의지에 반발하며 신고식을 옹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사간(언론기관의 수장) 최숙생..."새로 급제한 사람이 분관(인턴을 배치하여 실무를 익히게 함)되면 반드시 허참례와 면신례를 해야 하는데, 정응은 이 의식을 행하지 않고서 갑자기 홍문관 정자(임금 자문 기관의 정9품 관직)로 임명되었으니 곤란합니다." (중종실록 9년 11월 15일)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임금에게도 행실을 고치라 촉구하며 고위관리를 고발하는 등 시대의 걸림돌을 따지고 개혁을 이끌어야 할 언론기관의 수장이 신고식을 거치지 않은 자의 임명을 두고 부당하다며 문제제기합니다. 악습이 만연한 세태를 반영하는 한 사례이지요. 이들은 새로운 진입자를 상대로 기득권을 누리거나 방어하기 위해 신고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일종의 진입장벽이었던 셈입니다.
 

사헌부가 아뢰었다..."훈련원 참군(사관학교의 정7품 군직) 이종은 모든 신래가 면신례를 할 때면 직접 그 집에 가서 '내가 최근에 임기 만료로 이직하게 되었는데, 그러면 감찰(사헌부의 정6품 관직)이 될 것이다. 내 면신에 쓸 물품을 미리 비축하여 두고자 한다. 그대는 반드시 면신에 쓸 물품을 많이 준비했을 테니, 나에게 나눠준다면 그대의 면신례도 쉽게 하도록 하겠다' 라고 하는데, 신래들이 거의 다 두려워하여 나눠줍니다." (중종실록 33년 8월 17일)
 
사헌부가 아뢰었다..."회자(밤에 허름한 차림으로 선배들을 찾아다님)할 때 목면(화폐로 쓰는 무명)을 가지고 가서 선배의 종에게 뇌물로 준 뒤에야 비로소 명함을 들일 수 있음은 물론, 회자하는 기간이 50일이나 되어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회까지도 전부 신래에게 마련하여 베풀게 하는데 하루에 3∼4군데에 나누어 베풀기도 합니다. 선배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후한 뇌물을 요구하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신래의 종을 때려서 간혹 죽이기까지도 합니다." (중종실록 35년 3월 26일)

 
선배가 '업무상 위계' 곧 상대적으로 우위인 지위를 무기로 신입을 협박하며 '삥 뜯기'를 합니다. 이처럼 신고식을 명분 삼아 후배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합니다. 한 조직에 속해 매일 얼굴을 보는 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왕따'를 당할 생각에 아득해진 신래는 선배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배는 또 어딘가로 자리를 옮기며 새로운 부서의 신래가 되고, 따라서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곧 닥쳐올 자신의 신고식과 상납에 대비하기 위해 그는 후배에게 돈을 뜯어냅니다.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신래는 선배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자신이 당한 것처럼 신래에게 뇌물을 받거나 금품을 갈취하겠지요. 이렇게 먹고 먹히는 관계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여기에서 작동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나쁜 공생의 생태계를 만듭니다. 이것이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일 테지요.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한 집단의 일원이 되지 못할 뿐더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도 동참하기 힘듭니다.
 

율곡이 처음 급제했을 때 승문원(외교문서를 담당하는 관청)에서 선배에게 공손하지 않다 하여 파직되었다. 퇴계가 이 소식을 듣고, "신래를 희롱함은 과연 무리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그런 줄을 알고 그 길로 들어갔으니, 이군(율곡)인들 어찌 홀로 모면할 수가 있겠는가?"...퇴계가 손자 이안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배가 시키는 장난을 좇지 않을 수는 없으니 잠깐 하는 척하여 그 나무람만 모면할 뿐, 너무 난잡하고 부끄럼 모르는 행동을 하여 광대와 같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진실로 제거할 것은 제거함이 옳은 일인데, 지금까지 그렇지 못함은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5권 '인사문(人事門)')

 
조선 후기에 이익이 쓴 책 <성호사설>에 의하면, 이율곡은 신고식에서 선배에게 잘못 보인 탓에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장원만 아홉 번 차지했던 수재 중의 수재도 신고식의 문턱을 넘기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퇴계는 손자에게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 적당히 따르는 척 하라고 당부합니다. 유력한 가문의 일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이 부조리를 당해낼 수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입에 대한 집단적 학대는 조선시대에만 통용된 행태가 아닙니다. 인류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관찰된다고 보는데요. 우리 역사에서의 기록은 고려로 거슬러 갑니다.
 

 

신우(우왕) 13년 3월에 윤취가 시험을 주관하였는데, 시험에 임한 자는 모두 권문세가의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이들을 추하게 여기며 분홍방이라 불렀다. 아이들이 분홍 옷 입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권74)
 
이이가 아뢰었다..."고려 말에 과거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여, 급제한 자들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귀한 집 자제들이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지목하여 '분홍방(粉紅榜, 분홍색 저고리를 입은 어린애)'이라고 하였는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격분하여 모욕을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선조수정실록 2년 9월 1일)
 
옛날에 신래를 제압한 것은 호방한 선비의 기세를 꺾고, 엄격하게 위아래를 구분하여 그들로 하여금 규칙을 지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용재총화(慵齋叢話)')

 
면신례 등의 신고식은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금수저' 내지 '낙하산 인사'에 대한 당대의 저항 의식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인류학에서 이해하는 바와 같이, 개인의 사회화를 위한 학습의 일환이기도 했고요. 그러나 이러한 통과의례가 '정신 무장' 혹은 '기강 잡기'를 가장한 기득권자의 괴롭힘으로 변질되며 사회의 폐단이 되었습니다.

 

신입 관리 정양신(鄭暘臣)에 대한 면신례 문서. 오른쪽에 ‘신귀 신양정’, 즉 신입 정양신의 이름이 거꾸로 적혀 있고, 왼쪽에 다섯 개의 수결 곧 서명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보도에 의하면, 고 최숙현 철인3종 선수는 경주시청팀의 감독·팀닥터(라 불린 운동처방사)·선배들로부터 약 2년간 거의 매일 폭언·폭행·갈취 등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들이 동료 선수들과 차단시켜, 최 선수는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그들의 가혹 행위는 제 나름의 핑계가 있었습니다. 최 선수는 프로답게 우수한 성적을 내야 하고, 체중을 관리해야 하며, 강한 정신력을 지녀야 하고, 훈련에 따르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생활인으로서 운동선수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부당함과 부조리를 홀로 감당해냈습니다.

그러던 끝에 최 선수 측은 지난 2월부터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경주시·대한체육회 스포츠인권센터·대한철인3종협회 등 외부에 최소 6회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곳도 조치를 취하기는커녕 방관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수 생명을 담보로 한 민원·진정·고소 등이 무시되자, 최소한의 희망조차 잃은 최 선수는 물리적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았습니다.
 
해당 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소수의 폭행자 개개인의 일탈을 넘어서, 조직원의 생존을 볼모로 잡은 '갑질 사회'에도 있습니다. 따라서 당국은 가해자들을 일벌백계하고, 피해자를 구조·예방하는 법적·사회적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점검해야 하며, 갑질 문화를 타파하기 위한 체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연대하여 분노하고 감시해야 하고요.

이번에는 최 선수였지만, 다음에는 또 누가 집단적 가혹 행위의 피해자가 될지 모릅니다. 최 선수가 겪은 사건은 단지 성적제일주의가 만연한 체육계만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우리는 이번에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고려·조선에서도 개인에 대한 '직장 내 갑질'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똑똑히 보았습니다. 야만적 폭력은 일시적으로 움츠리는 듯 보이다가도 이렇게 대물림되는 법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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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메인 기사로 게재됐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 기사도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o6sh)

 

 

전 세계적인 코로나19의 창궐, 극우세력의 '역사 뒤집기', 일본의 무역 도발, 게다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의 난기류까지 더해져, 그 어느 때보다 한국 외교의 역량과 방향성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에 지난 기사("명나라 사대는 성심껏" 잠 못 이룬 세종의 속뜻 http://omn.kr/1o3jk)에 이어, 600년 전 조선의 외교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일전에 중국으로 보내는 '사람 조공'에 대해 소개한 바 있는데요("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http://omn.kr/1o05l). 조선에서는 그들 공녀(貢女) 외에 '화자(火者)'라는 부류의 사람들도 다수 중국의 황제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흠차내사(사신으로 파견한 환관) 한첩목아 등이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을 가지고 오니..."조선 국왕에게 알려서, 화자를 데려오게 하고...짐이 안남(베트남)에서 화자 삼천 명을 데려왔으나, 모두 우매하여 쓸 데가 없다. 오직 조선의 화자가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을 맡겨 부릴 만하다"...임금이 사적으로 한첩목아에게 말하였다. "황제의 뜻은 어떠합니까?" 한첩목아가 말하였다. "삼사백 명 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이들은 심으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많이 얻을 수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7년 8월 6일)

 
중국에서 온 사신이 황제의 뜻이라며 화자를 삼사백 명이나 보내라 합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씨를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그리 많은 화자를 구할 수 있겠느냐'며 난감해 합니다.

이들의 대화에서 화자란 거세한 어린 남성으로, 중국에 데려갈 환관 후보자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호칭이 화자일까요?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생식기를 제거한 후 황궁에서 노역을 시키는 죄인의 남자 자손인 엄할화자(閹割火者)의 줄임말이라 보기도 하고요. 책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에서는 '남자의 성기를 거세할 때 불로 지져 마무리했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외에, '남자(人)'에게서 고환을 가리키는 점 두 개가 떨어져 나간 것을 형상화하여 '화(火)'자를 쓴다는 설도 있습니다.

 

19세기 조선 환관의 초상화 ‘내시진영도內侍眞影圖’. 출처 : 조선민화박물관

첨지사역원사(외국어 통번역 담당 기관인 사역원의 종4품 벼슬) 배온을 보내 어린 화자를 거느리고 북경에 가게 하였다. 그 주본(황제에게 올리는 글)은 다음과 같다. "영락 21년(1423년) 8월 18일에 흠차소감(사신) 해수가 본국(조선)에 도착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어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서른 내지 쉰 명의 어린 화자를 뽑아서 거느리고 오라' 라고 전했으므로, 삼가 이를 뽑아 어린 화자 조지 등 스물네 명을 보내드립니다. 그 이름과 나이는 조지·김수명 21세, 임귀봉 19세, 김유·임득생·안경·김중 등은 18세, 박의·하오대·이군송 등은 17세, 이선·정융·정입 등은 16세, 최의산·이충진·김고성 등은 15세, 박수민·박전명 등은 14세, 김녹·최존자·강중·이전금·신득명 등은 13세, 이추 11세입니다." (세종실록 5년 9월 9일)

 
공녀처럼 화자도 원 간섭기부터 비롯된 '사람 조공'입니다. 위와 같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어서, 조선에서 명으로 보낸 화자들의 인원과 나이 등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고려에서는 원나라로 9회에 걸쳐 100여 명, 조선에서는 명으로 15회에 걸쳐 207명의 화자를 보냈습니다.
 

고려의 환관은 본래 계보가 백성이 아니면 천민·노비였다...원 세조(世祖)에게 (고려인 환관) 몇 명을 바쳤는데, 이들은 궁궐 안에서 시중드는 일과 궁궐 재물을 관리하는 일을 매우 잘하였다. (원 황제의)...은총이 매우 후하였다...이를 선망하고 따라 배워...불과 수십 년 사이에 거세한 무리들이 매우 많아졌다. 원의 정치가 점차 어지러워지며 환관들이 권력을 장악...나라(고려)에서 (원 황제에게) 청할 일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그들의 힘에 의지...고용보 등과 같은 자들은 모두 원래의 주인(고려)을 향해 짖으며 (원 황제에게) 헐뜯고 거짓말을 꾸며 재앙을 만들어냈다.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서문)
 
예부(중국 교육부·외교부)의 자문(외교문서)..."일찍이 조선국에서 화자 수십 명을 찾아 가지고 궁 안에 들어오게 한 의도가 관직을 임명하여 궁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는 데 있었으니, 국내(중국)와 국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이후로부터 자주 이 사람을 사자(使者)로 삼아 본국(조선)에 나아가게 했다." (태조실록 7년 6월 24일)

 
그들은 본래 고려·조선의 천민 혹은 평민 출신인데, 영민한 덕분에 황제의 총애를 받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통역을 거치지 않고도 소통이 가능하고, 우리나라와 중국 양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자신이 모시는 황제의 의중을 잘 알기에, 고려·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기도 했는데요. 대체로 공녀나 사냥용 매·개 등 조공품의 검수·수송을 담당했습니다. 조선 초기의 경우, 명에서 파견된 다수의 사신들이 고려인 혹은 조선인 화자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윤봉이라는 인물은 무려 열두 번이나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왔습니다.
 

윤봉은 본국(조선)의 화자이다. 옛날 서흥(황해도 서흥군)에 있을 때에는 몹시 가난하고 천하더니, 명나라 영락제 재위 기간에 발탁되어 북경에 나아가 지금까지 황제 세 명을 모셨다. 황제를 속여 해동청(송골매)·스라소니·검은 여우 등을 잡는다는 일로 해마다 우리나라에 와서 한없이 탐욕을 부리고 제멋대로 행동했다...본국의 사람으로서 본국에 해가 되어,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응대하기에 지쳐 죽게 하였으니...옛날부터 천하 국가의 혼란은 환관들 때문인데,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는 자가 모두 이런 무리이니 중국의 정치도 알만하구나. (세종실록 14년 12월 2일)

 
위의 기록은 윤봉에 대한 사관의 평가입니다. 조선 화자 출신인 명 사신의 대체적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신분 상승하여 조선을 방문한 그들은 자신들을 낯선 타국으로 보낸 고국에 대한 저항감 때문인지 보상 심리의 발로인지 극심한 탐욕과 행패를 부렸습니다.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귀한 물건들을 마구잡이로 요구할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사적 욕구를 채우는 일에도 꼼꼼했습니다. 노후 대책 마련을 위해 논밭과 금전 등을 달라 하고, 친인척에게 관직 하사를 요청하는가 하면, 자신의 고향을 승격시켜 달라는 등 요구가 끝이 없었습니다.

 

조선 출신 사신들의 횡포

 

대한제국 시대에 촬영한 경기개성 태평관의 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윤봉이 요구한 물건이 약 이백 상자나 되었다. 궤짝 한 개를 메고 가는데 여덟 명을 부려야 하는데, 궤짝을 멘 사람들이 태평관(태평로에 있던 사신 숙소)에서부터 사현(홍제동에서 오르는 무악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끊임이 없었다. 사신의 요구가 많은 것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세종실록 11년 7월 16일)

 
명 사신이 조선 정부로 받은 어마어마한 물품을 공수하는 장면이 실록에 그려져 있습니다. 한 상자를 운반하는데 여덟 명이 필요하며 짐이 이백 상자이니, 인부가 무려 천육백 명이나 동원됐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사신의 숙소인 태평관이 있던 현재의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무악재역까지 약 3km로 측정되고요. 짐을 멘 천육백 명의 사람들이 약 3km의 긴 줄을 이루는 광경을 보며, 당시 조선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임금이 늘 (사신) 창성이 염치없이 재물 탐하는 것을 걱정했다. 이날 창성이 대언(임금 비서) 김자를 보고 성내었다. "전하는 어찌하여 내 말을 듣지 않는가." (세종실록 10년 9월 23일)
 
"명 사신 이상이라는 자는 가는 곳마다 번번이 사람을 구타한다니...창성이 영접도감의 은 식기를 훔쳐갔으며, 또 지나가는 지방에서 의자라든가 걸상 같은 물건도 좋은 것이 있으면 보는 대로 탈취해 가고, 또 민간인의 말을 빼앗아 간 것" (세종실록 11년 8월 12일)
 
임금이..."창성이 청구하는 것은 끝이 없고, 하나라도 마음에 불쾌함이 있으면 바로 조선의 관리를 매질하는 등 모욕이 지나치니,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겠는가?"...황희와 맹사성 등이 함께 의논해 아뢰었다..."분노를 품고 원한을 쌓아서 중국 조정에다 거짓으로 호소한다면, 중국 밖에 있는 나라에서 일일이 변명하기가 어려워 훗날에 큰 걱정거리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하오니 능욕을 꾹 참고 우대하여 보내는 것이 옳겠습니다." (세종실록 11년 6월 19일)

 
조선인 출신뿐 아니라 중국인 사신도 황제의 위세를 믿고 오만방자한 행태를 보였습니다. 정부에 갖가지 물품을 요구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머물던 곳에서도 좋은 물건이 보이면 훔쳐가고, 민간인의 재물까지 빼앗아갑니다.

게다가 그들은 조정의 인사에 개입하고, 임금의 대리인인 대언 등 조선의 관료에게 서슴없이 폭력도 행사했는데, 이는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다 참다 대책 수립을 위한 국정 회의를 합니다. 사신들에게 논리적으로 따질지, 아니면 그들의 행태를 황제에게 알릴지 등을 놓고 수차례 토론하지만, 매번 '전략적 인내'로 의견이 모아집니다.
 
우선, 그들은 비공식 통로를 통해 중국 황제와 관료들에게 로비를 할 수 있습니다. 중국 황실과 조정의 내밀한 정보를 들을 수도 있기에, 조선 정부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고요. 무엇보다 그들이 조선에 불리하거나 거짓된 정보를 황제에게 흘리면, 황제와 물리적 거리가 먼 조선 정부에서는 그 뒷감당이 힘듭니다. 그러니 입술을 깨물며 그들의 '갑질'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대의 예를 함이 지나치다고들 말한다는데, 최근 중국이 매년 사신을 보내 상을 내려줄 정도로 특별히 융숭하게 대우하는 일이 일찍이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어와서 나에게 말하고, 몰래 논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0년 윤4월 18일)

 
사신들의 부당한 청구를 번번이 수용하자, 사대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관료 사회마저 동요합니다. 심지어 명에 대한 사대가 너무 심하다며 임금의 '뒷담화'를 하고, 이것이 세종의 귀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태종 때부터 이어온 사대 외교의 효과는 명 황제의 '신뢰 계좌'에 차곡차곡 쌓인 모양입니다. 어느 날 황제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황제가 칙서에서 말하였다. "이제부터 (명나라) 조정에서 보내는 환관 등이 왕의 나라에 도달하거든, 왕은 예의로만 대접하고 물품은 주지 말라. 조정에서 구하는 모든 물건은 오직 어보(황제의 도장)를 찍은 칙서에 의거해 마땅히 부쳐 보내고, 짐의 말이라며 (사신이) 말로 전하면서 구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은 다 들어주지 말라. (조선) 왕의 부자가 (명) 조정을 공경히 섬겨 오랜 세월을 지냈으되, 갈수록 더 극진히 함을 짐이 깊이 아는 바이며, 가까이에 있는 환관들이 이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왕은 염려 말라." (세종실록 11년 12월 13일)

 
사신들로 인한 곤욕을 황제도 알게 된 모양입니다. 황제의 도장을 찍은 외교문서에 기재된 청구 물품 외에, 황제의 말이라 사칭하며 사신이 요구하는 물품은 내어주지 말라는 황제의 공식 문서가 도달합니다. 그래도 안심하지 못할 것 같자, 그간 조선에서 대대로 보여 온 지성사대로 미루어 진정성을 믿으니, 환관들의 거짓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말까지 덧붙입니다.
 

우대언(임금 비서) 황보인에게 사신을 문안하라 명하니..."창성이 말도 하지 않고 보지도 않으며, 또 답례도 하지 않았습니다." 창성이 입국한 뒤로 높고 낮은 임금의 대리인을 볼 때마다 모두 그러했으니, 이는 모두 물품을 주지 않아서 화난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12년 7월 24일)
 
우부대언(임금 비서) 남지를 보내 사신을 문안하고..."앞서 온 황제의 칙서에서 '(사신의) 입으로 전하는 짐의 말은 모두 듣지 말라.' 하셨사오니, 사신의 말을 통해 물품을 바치는 것이 사대의 예에 합당하겠습니까?"...(사신이) "이 나라는 지극히 불손하다. 나중에 (명에 대해) 반역하려는 것이겠지?" (세종실록 12년 8월 4일)

 
사신들은 여전히 황제의 전언이라며 외교문서에 기입되지 않은 물품들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전의 외교문서에, 사신이 구두로 청구하는 물품은 주지 말라는 황제의 당부가 있었다며, 이를 어기면 사대의 예에서 어긋난다는 논리로 대응합니다. 자신들이 모시는 황제의 명이니 이들도 도리가 없습니다. 조선 관료들에게 분풀이를 해대며,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엿봅니다.
 

진응사(매 조공을 위해 보낸 사신)의 통사(통역사)가 북경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태감(환관의 우두머리) 윤봉이 황제의 명을 전했습니다. '(조선) 왕이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는데 한 가지도 어김이 없었으며...짐이 항상 두르는 허리띠의 고리를 지금 특별히 함에 넣어 준다.'" (세종실록 12년 4월 20일)
 
임금이 가까이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창성이...'황제께서 하사하신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으십니까?'...이 사람이 기필코 내 과실을 찾아내서 이를 드러내려는 수작이다." (세종실록 12년 7월 28일)

 
물품 요구에 세종이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사신은 태세를 전환하여, 황제가 특별히 하사한 허리띠의 고리를 왜 차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작은 실수라도 잡아내려 눈에 불을 켠 그들 때문에 대책 회의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 세종은 정도 곧 올바른 도리에 입각해 대처하는 것이므로 당당하다고 말합니다.
 

임금이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말하였다..."우리나라에서 황제의 칙서를 공경히 받들어 물품 주는 것을 행하지 않은 것을 누가 그르다고 하리오. 고금과 천하에 정도로써 행하는 것을 그르다고 하는 자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세종실록 13년 8월 4일)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누군가가 조선의 매 조공이 부족하다며 황제를 부추긴 모양입니다. 황제는 중국의 지배 권역이지만 여진족이 거주해온 땅으로 사람들을 보내 매를 잡겠다며, 이때 필요한 식량과 인원 등을 제공하라고 합니다. 조선인이 섣불리 이곳에 들어가면 여진족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나, 그렇다고 황제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는 외교안보적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좌대언 김종서·우대언 남지·좌부대언 송인산 등이 아뢰었다..."사신이 오는 것이 어느 해나 없을 때가 없었으며 매번 상을 내렸는데, 금년에는 유독 없으니 아마 (황제에게) 이간질의 말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들이 채포군(사냥꾼)을 보내 매와 표범을 잡으니 이것은 의심할 만한 단서입니다." (세종실록 13년 10월 16일)
 
좌대언(비서) 김종서를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황제가 사신을 보낼 때마다 칙서에서 (조선이 행한 지성사대의) 아름다움을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이번 칙서에 있는 말은 마치 고아를 농락하는 것 같으니, 언제 황제가 이렇게까지 한 적이 있느냐?"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원한을 품고 조선에 불리한 일을 저지르는 사신들을 구슬리기 위한 비상대책회의를 수시로 소집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국가와 최고통수권자의 가장 아픈 곳을 강력하게 찔러버립니다. 황제에게 바칠 매를 잡는다며 우리의 함경도에까지 군사와 사냥꾼 수백 명을 이끌고 들어옵니다. 어떻게 이간질을 했는지 황제와 쌓은 그간의 탄탄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우리의 국토주권을 짓밟은 것입니다.


세종의 정신 승리?

 

청국 사신. 출처 : 가회민화박물관

아마도 그들은 승리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제는 조선이 자신들의 무서움을 알리라, 그래서 요구를 모두 수용하리라 기대하며 의기양양했겠지요. 그러니 세종은 황제가 제시한 원칙과 사신들의 요구가 상충되지 않을 그 어느 지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임금이 가까이에 있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기후의 춥고 더움에 따라 의복을 주는 것이야 잘못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주인이 손님에게는 본래 선물하는 도리가 있는 것이다. 이제 사신이 머무르면서 겨울을 지내게 되는데, 어찌 모른 체하고 따뜻한 옷을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신에게는 예전처럼 선물하고, 두목(중국 사신단을 수행하는 군인 겸 상인)에게는 조금 줄여서 주는 것이 좋겠다." (세종실록 14년 6월 11일)

 
사신이 자신과 수행원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방한용품을 요청하자, 이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조선의 조정에서는 토론이 벌어집니다. 이때 세종은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사신이 원하는 물품을 주자. 그러나 이는 굴복하여 사신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외교문서에는 기재되지 않은, 사신이 구두로 요구하는 물건은 일체 주지 말라는 황제의 엄명을 어기는 일 또한 아니다. 오히려 황제의 대리인이라는 귀한 손님을 대하는데 야박하면 곤란하다' 라며 동서고금 통용된다는 '집 주인의 손님 접대 의무론'을 내세웁니다.
 
이는 세종의 '정신 승리'일까요? 제게는 명분과 실리가 양립하는, 즉 중용(中庸)의 미를 외교에서 발휘하려던 한 국가지도자의 안간힘 그리고 묘수로 보입니다.

600년 전 중국과의 외교사를 접하며,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다자 외교를 돌아보게 되는데요. 일본 정부뿐 아니라 네오콘을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외교관들이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안착을 위한 노력을 사사건건 방해해왔음이 존 볼턴 전 미국 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우리 정부의 진척 속도가 불만족스러운 북한은 '봄이 온다'며 잡았던 손을 놓고 무력행사를 예고합니다. 두더지잡기 게임처럼, 한 곳을 막아내면 금세 다른 곳에서 악재가 튀어나오는 형세입니다. 살얼음 낀 겨울 내를 건너는 듯한 우리의 외교, 이제 어떻게 명분과 실리를 잡는 중용의 미를 발휘해야 할까요?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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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인 김호 경인교대 교수님과 함께한 [역사로 노닐다 - 정약용,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위민爲民].

저는 진행자로서 교수님과 대담을 나누었는데요.

(사실 제 임무는 '저질 질문' 담당이었습니다^^;;)

다산 정약용이 어떠한 마음으로 <흠흠신서>를 저술했는지, 당시 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어떠했는지 등을 배웠고, 또한 우리 시대의 법 정의와 공정성에 대해 더불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소 저는 '세종이야기꾼'으로서 또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로서 강의하고, 스토리텔링 콘서트에서 사회를 보고, 글을 씁니다.

모두 공부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 일인데요.

이번 공연을 계기로, 김호 교수님의 교육 철학, 연구자로서의 태도 등을 접하며, 자연히 저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된 것이 가외 소득이었습니다.

다산처럼 또 교수님처럼 '정성 성(誠)' 글자를 새기며 정진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더랬지요.

강호에는 고수, 아니 스승님들이 참 많습니다.

 

당일에 남양주시 유튜브 채널에서 생중계되었는데요.

녹화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되었으니, 살펴보시면 교양과 생각을 깊게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물론 재미도 있습니다!

(저는 25:00 즈음부터 등장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OEG7dO_Pmg

 

공연 2주 전에 사전 미팅을 가졌습니다.

처음 뵌 김호 교수님의 주요 인상은 진중함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교수님과 말씀을 나누며, 점점 시니컬함 속 유머와 따뜻함이 느껴졌는데요.

제가 느낀 교수님의 매력과 아래 사진의 표정이 관객들께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영상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나옵니다.

 

김호 교수님의 귀요미 표정^^

마지막으로, 공연과 관련된 보도는 아래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앞으로 또 어떤 재밌는 일을 꾸밀지 관심 보내주세요 :=)

http://www.m-i.kr/news/articleView.html?idxno=739711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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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에는 세종시대의 외교에 대한 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3jk)

 

최근 미국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 출간되며,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계에도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회고록의 사실 왜곡이 극심하다'는 의견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측에 전했다고 알린 바 있는데요. 일반 대중들은 회고록을 통해 한미 외교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한국 정부가 타개하려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연관 지어, 600년 전 조선과 명나라 간에 이루어졌던 외교사에서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기사에서 세종실록에 등장했던 '사람 조공'을 다룬 데 이어(관련 기사: "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omn.kr/1o05l), 이번에는 매 조공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매사냥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우표. 출처 : 한국우표포털사이트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은 삼국시대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사냥은 생업의 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 곧 '첫째 매 사냥, 둘째 말 타기, 셋째 첩 두기'라 하여, 당시의 '고급 유희' 중에서도 첫 번째로 치는 것이었는데요. 매가 사람 대신 하늘을 날아 사냥하기에, 지금의 아바타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선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조공을 바치는 일은 대충대충 할 수 없다... 하물며 황제의 칙명에 '짐이 조선을 대우함이 후한 편인데 어찌 매 바치는 한 가지 일을 아직까지 어렵게 여기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세종실록 9년 8월 1일)

 
고려 때 매사냥이 가장 융성했고, 원나라에 사냥용 매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명에 대한 조선의 외교로도 이어집니다. 조선 매는 영민함과 사냥 능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했으므로, 명 황제가 매우 반기는 조공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나서서 챙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원(圖畫院, 그림 그리는 일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각종 매를 그려 전국에 나누어 보내서, 그림에 의거해 매를 잡아, 중국에 공물 바치는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2월 21일)
 
강원도 감사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였다. "도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는 참매 중에 몸집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것은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5일)
 
함길도(현재의 함경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초여름에 수컷 새매와 참매를, 품질이 좋고 몸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놈을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1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도에서 기른 조공용 수컷 새매 4연(連)을 밤의 서늘함을 이용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3일)

 
찍어낼 수 있는 공산품도,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곡식도, 길러낼 수 있는 가축도 아닌 터라, 매의 확보는 변수가 큰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수령·감사·절제사에게 상시로 매를 잡아 서울로 보내도록 독려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그들로서는 업무 과중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중앙 정부에서는 채방사(採訪使)라 하여, 지방의 실정이나 특산물을 조사하는 임시직 관리까지 파견하며, 매 포획을 도모합니다.
 

사헌부 장령(현재의 검찰·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정4품 벼슬) 윤수미가 아뢰었다. "지금 조공으로 보낼 흰매를 잡는 일 때문에 채방사를 전국에 나누어 보냈는데... 다만 금년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계가 염려스러운데, 채방사를 나누어 보내면 어찌 백성들에게 폐해가 없겠습니까... (채방사를) 보내지 마시고 폐해를 제거하소서."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정흠지가 아뢰었다… "고려 말에 처음으로 처녀를 뽑아 (중국으로) 보내는 법이 생겼사오나, 그 폐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하물며 해청은 포획이 매우 어려워서 이런 이유로 지방 백성들에 대한 민폐가 막심합니다."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매 사냥' 탓에 고통받은 민간, 그럼에도 세종의 염려는...

담당 공무원은 물론 민간에서도 매 포획에 따르는 고충을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성사대(至誠事大: 지극정성을 다해 사대함)의 기조 아래 세종은 신하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 잡기를 강행합니다. 조선 송골매는 해청(海靑) 또는 해동청(海東靑)이라 불리며 최고로 손꼽혔습니다. 따라서 명 황제는 물론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사신들은 매 중에서도 특히 해동청 조공을 꾸준하고 거세게 압박해왔습니다.
 

찬성(조선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종1품 관직) 권진이... "해동청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만들어 황제께 아뢰시어 뒷날의 폐해를 막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어허, 이 무슨 말인가. 사대는 마땅히 성심껏 하여야 할 것이며, 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해동청이)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일 수는 없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임금이 말하였다… "나의 궁 안의 심부름꾼과 환관도 많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일을 모를 것이 무엇인가? 내 이미 황제를 위하여 (해동청을)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려니와, 또 황제께서 '일전에 분부한 해동청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느냐'라고 이르신다면, 내 장차 무슨 말로 대하겠는가."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세종은 매를 잡는 족족 명 황제에게 보내려 하지만, 신하들 의견은 다릅니다. 명에서는 매가 쉽게 잡히는 줄 알고 앞으로 더 많이 보내라 압력을 가할 것이므로, 매가 잘 안 잡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잡은 매의 일부만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지성사대라는 명목을 들어 매 조공을 강행했지만, 세종에게 실은 두 가지 염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내밀한 정보라도 결국 명으로 새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혹여 거짓에 기반한 외교로 대했다는 사실을 상국(上國), 즉 조공 받는 큰 나라가 알게 된다면, 어떠한 불이익이 올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해동청 조공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여나 (명에서)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다." (세종실록 11년 11월 16일)

 
세종의 두 번째 걱정은 명에서 직접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괜한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사신 농간에 의해, 황제는 조선 접경지대로 군인과 사냥꾼을 대거 파견합니다. 해동청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우리 국토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기에, 조선 백성들의 피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황제의 칙서에서… "이제 내시 창성·윤봉·장동아·장정안 등을 보내는데 (명나라) 관군 백오십 명을 거느리고 모련위(毛憐衛, 현재의 랴오닝·지린·헤이룽장 일대) 등의 지역에 가서 해동청·토표(스라소니) 등을 잡게 하겠다. 칙서를 받거든 (조선의) 왕은 곧 적당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호송하되... 사용되는 양식은 번거롭지만 왕이 공급하기를 바라며, 만일 날이 춥거든 쓰기에 알맞은 옷·신 같은 것과 아울러 잡은 해청·토표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먹일 고기와 모이로 적당한 것을 왕이 또한 적절하게 마련해 주며, 사람을 시켜 국경에 나가기까지 호송하라."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좌대언(임금 비서) 김종서를 내전(임금의 생활공간)에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 "(명에서) 짐승 잡는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지나가는 고을에 민폐를 많이 끼칠 것이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처럼 하여, 해마다 와서 우리 백성을 거듭 괴롭힐까 심히 두려우니, 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 그때 밤이 2경(밤 9~11시)이 넘었는데도 임금이 잠을 자지 못하고 어린 내시 인평만이 곁에서 모셨다. (세종실록 13년 8월 20일)

 
명에서는 파견할 사신·군인·사냥꾼의 식량과 옷, 그리고 해동청과 스라소니를 잡게 되면 그 먹이까지 우리에게 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 본래 조선 북쪽 땅은 척박한데 그들 요구까지 들어주려면, 수령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조선 공무원과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가축 등을 수탈해 가는데 처벌은 받지 않아, 민심은 소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올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일어난다면 그 감당은 어찌해야 할까요.

세종은 현재의 NSC와 같은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골몰하며,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합니다. 명 사신은 한술 더 떠서, 우리 땅인 함경도까지 와서 매를 잡겠다고 예고합니다.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관직) 정연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사신이 '내년 5월에 조선에 와서 6월에 머무르고 7월에 돌아가는데, 함길도에서 매를 잡으려 한다'라고 합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 질서에 따라 명과 형식적인 상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이 명의 제후국이라는 외교 형식을 취하나 통치의 자주권은 인정됐습니다. 예컨대 조선은 명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해를 세는 호칭인 연호(年號)와 왕의 인장인 국새(國璽) 등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명에서 온 수백의 사신·군인·사냥꾼 무리가 조선 산과 들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는 일, 곧 국토에 대한 주권 침탈 행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조 판서(현재의 외교부 장관) 신상이 말하였다. "지난해는 사신 네 사람이 함길도에 와서 매를 잡았사온데, 올해에도 왔사오니, 어찌 뒷날에 또 오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함길도에 비밀리에 분부하시어, 고의로 잡기 어려운 척 하고 잡았더라도 놓아버리라 하시어, 긴 앞날의 폐단을 없애주소서." ... 그 뒤에 경성(지금의 함경북도 경성군) 사람이 해동청 1연을 잡았으나, (사신 접대를 맡은) 이징옥이 일부러 놓아주었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이징옥이 아뢰었다. "소신이 어리석고 판단력을 잃어, 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싫어서 고의로 놓아 보냈습니다." ...(임금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 조금도 거짓을 행한 것이 없는데, 이징옥이 큰일을 그르쳤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좌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맹사성 등이 "매를 놓아준 것으로 죄를 다스린다고 말하면, (명 사신) 창성 등이 이를 듣고는 반드시 이전에도 이와 같은 거짓이 있었으리라 의심할 것입니다." …(의견이 분분하여) 밤은 삼경(밤 11~1시)을 향하는데, 임금이 아직도 궁궐에 앉아서 이징옥을 의금부(지금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가두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잡은 매 일부러 놓아준 관료... 세종 "용서할 수 없다"

명 사신과 수행원들의 욕심이 과한 데다가 민간에 대한 행패도 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선 국토와 국민을 유린하며 매를 잡으러 올까 염려한 현장의 관리는 잡은 매를 날려 보내다 발각되었습니다. 그간 쌓아온 지성사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 염려되는 세종은 관리를 처벌하려 합니다.
 

의금부에서 이징옥의 죄를 심문하여 아뢰니, 직첩(관직 임명장)을 거두고 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20일)
 
(명 사신) 윤봉이 말하였다. "(이징옥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관대히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임금이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명하여 답신하였다. "사신을 속인 일은 과연 하늘을 속인 것과 같으니 다른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신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내가 용서할 수 없노라." (세종실록 14년 11월 21일)

 
세종은 국방에 큰 공이 있어 신뢰하는 신하 이징옥이지만 황제의 명을 어기는, 즉 명과의 외교를 그르칠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킨지라 귀양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사신은 어쩐 일인지 그를 처벌하지 말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과욕과 횡포가 개입된 이 사건이 황제에게 탄로날까봐 염려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예사 잘못이 아니라며 처벌을 강행합니다.

 

18세기 문인 화가 심사정沈師正의 그림 ‘토끼를 잡은 매 그림豪鷲搏兎圖’의 일부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임금이 말하였다... "(공녀를) 간택하는 즈음에도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막심했지만, 조공 바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조치하였던 것이다. (매 조공의 폐해는) 이것과 비교한다면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일은 무거운 것이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세종은 대표적인 애민(愛民) 군주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고려보다 사대 의무의 수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것이 진정한 국익 추구일까요? 과연 세종은 사대주의자였을까요?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일렀다. "근래 황제가 북쪽을 정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 안남(安南, 베트남)에 출정한 것은 황제의 실책이었다. 우리 동방(조선)을 생각하면,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며 상국(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진실로 마음을 다해 사대하여 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당시 명은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1407년에 베트남을 정복했고, 몽골도 정벌하려 다섯 번에 걸쳐 황제가 직접 전장으로 나선 바 있습니다. 또한 '정화(鄭和)의 원정'이라 해 약 30년간 일곱 번이나 대함대를 파견하여 멀리 케냐 해안까지 정벌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강대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 속에서 '전쟁 없는 나라'를 향한 최고통수권자의 고뇌를 600년 시간을 사이에 두고 목도하게 됩니다.
 
(* 다음 기사에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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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국면의 장기화에 따라, 예정돼 있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제 생계에도 대중의 문화적 갈망에도 보릿고개가 들었습니다.

다행히 인문학 콘서트 [역사로 노닐다]는 처음부터 유튜브 생중계로 기획되어서, 랜선으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7월 행사에는 관객을 열 분 모실 수 있었지만, 이달에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화에 의해, 완전히 스탭들로만 현장을 채웠습니다.

그래도 유튜브로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투입 대기 중. 두근두근하는 와중에도 '앙상블 IF'의 오프닝 연주가 정말 청아하고 좋았습니다.

두 달간 정약용과 그의 저작 속 생각을 만났습니다.

지난 7월에는 한신대 김준혁 교수님과 '목민심서와 리더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고요.

이달에는 경인교대 김호 교수님과 '흠흠신서와 법정의'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습니다.

정조와 다산이 꿈꾸었던 세상, 그에 따른 법의 역할과 범위, 코로나 장발장 등 최근 사건에서의 공정성 논의 등 약 600년의 시공간을 오갔는데요.

김호 교수님께서 차분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해주셔서, 전공분야가 다른 제게도 참 많이 공부가 됐습니다. 

 

제 표정이 왜 저렇게 썩었는지... 아마도 살인 사건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였나 봅니다.

행사 2주 전에 기획자, 김호 교수님과 함께 셋이서 사전 미팅을 했더랬습니다.

교수님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말씀에 매료됐었는데요.

그 부분을 최대한 살리고자, 교수님의 논문과 보조자료들을 읽고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유튜브로 만나신 여러분도 저와 같이 교수님의 매력, 다산에 대한 흥미, 현실세계에 대한 참여의식 등을 느끼셨기를 기대합니다.

 

리허설 때에도 철저히 마스크를 썼다지요. 방송에서는 저 답답하고 더운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관객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가 더욱 기운을 내야 했습니다.

들어주는 이가 없는 곳에서 강의나 발표 등을 하려면 정말 어색하거든요.

약 두 시간의 방송을 마치고 보니 이마와 등에 땀이 흥건하더라고요.

어서 코로나 국면이 진정되어, 다음에는 관객 여러분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눈맞춤하며 소통하기를 기원합니다.

 

* 일시 : 2020.08.26(수). 오후 04:00-05:50

* 장소 : 남양주시립박물관 (남양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보기 가능)

* 행사 : 온택트 인문콘서트 [역사로 노닐다 - 정약용,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爲民위민]

* 출연 : 연주 - 앙상블 IF

           강연 - 경인교대 김호 교수

           진행 - 실록읽어주는여자 오채원

* 기획, 연출, 사진 : 하정아

* 보도 : https://www.fnnews.com/news/202008222028194082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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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 중 일부이며,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05l)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 즉 병사·말 형상의 부장품. 여기에서 용俑은 장례에 부장품으로 쓴 사람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람 순장을 대체한 것이다. 출처 : 연합뉴스)

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인이 30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였다. 식사가 끝난 뒤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하는 소리가 궁궐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매 죽게 되었다. (조선 여자) 한씨가 죽을 때 김흑에게 말하였다. “유모, 나는 가오. 유모, 나는 가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어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죽자, 후임자인 홍희제는 영락제의 후궁들을 함께 묻습니다. 저세상에 가서도 황제에게 봉양해야 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조선사람 한씨의 유모 김흑이 생환하여, 순장되던 상황을 위와 같이 증언합니다. 실록 기사에 등장한 한씨와 최씨, 그들을 역사는 공녀貢女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貢이란,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가 윗권력에게 바치는 물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공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원나라 때 활성화되었던 사람 조공은 국가가 명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왕이 먼젓번에 보낸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여자들은 모두 음식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며, 제조하는 것이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종실록 16년 12월 24일)

 

명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는 조선에서 보낸 집찬비執饌婢, 즉 음식 만드는 계집종의 솜씨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 외에도 가무를 제공하는 창가비娼歌婢, 여러 잡무를 처리할 계집종, 그리고 황제의 후궁으로 삼을 양반가문의 아름다운 처녀를 명 황실로 보냈습니다.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이 황제의 명을 알렸다.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임금이 말하였다. “사대事大의 예禮를 내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서 이미 처녀 다섯 명을 준비해두었다.” (태종실록 17년 5월 2일)

 

임금이 황제에게 보낼 처녀를 직접 간택하였다. (세종실록 8년 12월 9일)

 

사대 곧 큰 나라를 섬긴다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는 중국의 공식 및 비공식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처녀 조공인 것이지요. 영락제부터 선덕제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26년간 7회에 걸쳐 114명의 공녀를 보냈습니다. 세종시대만 따져보아도 임금이 직접 면접을 본 횟수가 16회나 될 만큼 황제에게 보내는 처녀의 선발은 국가 차원의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 등이 의정부(국가 최고 행정기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전국의 처녀를 함께 선발하였다. 황엄이 처녀들 중에 미인이 없다고 노하여, 경상도로 왕이 파견한 환관 박유를 잡아다 결박하고 취조하였다......곤장을 치려다 그만두고, 교의(임금이나 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정승을 앞에 세우고 욕을 보이고 나서 태평관(사신의 숙소)으로 돌아갔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 대신에게 하대하며, 왕명을 받잡고 처녀를 고르러 지방으로 파견된 이를 직접 처벌할 만큼 명나라 사신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황제를 대행한다는 명목을 띠고 온 그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조공할 처녀의 선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음과 같은 순서 및 기준에 따랐습니다.

 

진헌색(중국에 보낼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한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계집아이를 모으고, 전국의 시집장가를 금지하였다......경차관(특수 임무를 주어 지방에 파견한 관리)을 각각의 도에 나눠 보내서 처녀를 뽑게 하였다. 공공 및 민간의 천민과 노예는 제외하고, 좋은 집안의 13세 이상 25세 이하 처녀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조금 뒤에 또 임금이 환관을 전국에 보내서 처녀를 간택하니, 전국의 민심이 흉흉하게 동요하여 몰래 혼인을 맺는 자가 매우 많았다.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이날 (사신이 면접하는 자리에서)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에 속한 정3품 관리)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군수품 관리 기관) 이운로의 딸은 다리에 병이 든 것처럼 절룩거리니,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현재의 검찰·감사원)에서 조견 등이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아전을 보내서 도망 못 가도록 지켰다. 조견은 개령(현재의 경북 김천)에 이운로는 음죽(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강제 거주시키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찾기 위해 전국으로 관리가 파견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차출을 피하기 위한 온갖 방책이 등장합니다. 집안에서는 국가의 금혼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공녀 후보로 발탁된 여성들은 면접관 앞에서 신체 혹은 정신에 장애가 있는 양 행동합니다. 국법 혹은 왕명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것보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붙이로 연명해나가는 일이 비교 안 될만큼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울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사신과 일곱 명의 처녀가 (경복궁의 동쪽 문)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고 울면서 보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9년 7월 20일)

 

세 사신이 (간택된 처녀) 한씨를 모시고......(명나라로) 돌아가니......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의 언니 한씨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이제 또 (동생마저) 가는구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산송장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10월 4일)

 

앞서 보았던 영락제의 후궁 한씨가 순장당한 4년 뒤, 그의 동생마저 공녀로 차출되어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사건에 이제는 당사자가 되어 떠밀려 들어갑니다. 자신도 죽은 목숨이라 여겼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나라냐?’고요.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 정당화될 수 없어

 

(명나라) 사신 이충·김각·김복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처녀 몸종 9명, 창가비 7명, 집찬비 37명을 거느리고 왔다. (세종실록 17년 4월 26일)

 

세종 17년인 1435년에 공녀 53명이 귀환한 후, 명 황실에 대한 처녀 조공은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청나라로 전환된 뒤에 재개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예, 미군 주둔 시의 ‘양공주’로 재현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희생으로 국가를 유지했다고, 약소국의 외교란 그런 것이라고요. 그렇다고 하여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 및 사회 차원의 거래라는 구조를 가리고, 개인의 선택 혹은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따라서 피해자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피해 당사자에게 입을 다물도록 강요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신대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재점화되었습니다. 특정 역사를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사회가 현 사안을 회피한다면, 우리의 누이가 딸이 이웃이 유린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공녀는 특수한 한 시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목도해왔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아픈 역사를 직시할 때입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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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의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로,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wws)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는 더위를 타기 시작했다. 이때 물에 손을 넣으면 더위가 저절로 풀린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죄수가 감옥에 있으면, 더위 먹기 쉬워서 어떤 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 안에 두고 자주 물을 갈고,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한다든지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예전에 이러한 법이 있었는지 검토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때는 바야흐로 세종이 52세 되던 해입니다. 실록에는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8월 초 즈음이 되겠지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에, 불쾌지수가 높은 시기입니다. 이 한 여름에 세종은 ‘더위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나도 나이를 먹으니 더위를 탄다’고 토로합니다. 아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과 같은 건강 상태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와 그 후속 작업들에 매진하며 체력이 고갈된 탓인 듯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의료진의 레벨D 방호복만큼은 아니어도, 긴팔 옷을 여러 겹 껴입어 통기성이 떨어지는 복식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게도 그는 더위 탈출 비법으로 얼음 깨먹기도 뱃놀이도 냉수마찰도 아닌, 물에 손 담그기가 최고라고 추천합니다. 이마저도 혼자 즐기기 미안했는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수감자 그러니까 사회 취약 계층에 해당되며,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세종은 입으로만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에 물동이를 두고 자주 물을 갈아주어, 손을 씻게 하자고 건의합니다. 죄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인권·복지 차원의 개선안 혹은 해결책을 제안한 후, 이것이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정책으로서 상시 운영되도록 법제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참조할 과거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전문연구기관인 집현전에 명을 내립니다.

 

(형사 행정에 대한 풍속화를 엮은 《형정도첩刑政圖帖》 중에서 감옥 내부를 그린 그림.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 한 달의 검토 기간을 갖고,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감사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무척 구체적입니다.

 

1. 매년 (음력) 4월부터 8월까지는 감옥 안에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바꿔 놓을 것.

2. 5월에서 7월까지는 희망자에 한해서 열흘에 한 번씩 목욕하게 할 것.

3. 매월 한 차례 희망자에게 머리를 감게 할 것.

4. 10월부터 1월까지는 감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아 보온에 신경 쓸 것.

5.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간수)이 직접 점검하고 살펴서 도주를 막을 것.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에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絜’은 ‘재다’라는 뜻이며, ‘矩’는 ‘곱자’ 곧 ‘ㄱ자 모양의 자’를 가리킵니다. 혈구지도를 직역하자면, 곱자로 무엇인가의 길이를 재는 방법이겠지요. 내 마음 속의 자로 다른 이의 마음을 재는 것, 즉 내 처지를 미루어서 남의 처지를 가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세종은 품속의 자를 수시로 꺼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만사가 귀찮은 더위 속에서도 말이지요.

 

(근무 교대 후 냉수로 더위를 식히는 선별진료소의 의료진. 출처 : 뉴시스, 2020-06-08.)

6월 초순인데도 낮에는 최고 체감 온도가 30도를 넘는 한 여름 날씨를 보입니다. 급기야 지난 9일에는 기상청에서 서울에 폭염주의보를 발효하고, 강릉·양양에는 열대야가 찾아왔습니다.

 

이날 인천의 한 워크스루Walk through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고 근무하던 간호사 세 명이 탈진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방호복은 통기성이 낮은데다, 습기에 약해서 의료진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얼음조끼조차 입을 수 없다고 합니다. 6월 11일자 YTN의 보도에 의하면, 레벨D 방호복의 내부 온도를 측정했더니, 평균 체온보다 높은 37.6도로, ‘1인용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지경입니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5개월간 고강도 근무를 이어온 의료진이 더위로 고생하는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우리 개인은 위생에 주의해야겠습니다. 물론 마스크 착용은 더위를 가중시키지만, ‘1인용 사우나’를 입고 근무하는 분들을 떠올려야겠지요.

 

더위로 고통 받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취약계층 어르신들입니다. 예년에는 동주민센터·복지관·경로당 등을 활용해 무더위 쉼터를 운영했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휴관 내지 폐쇄된 상황입니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거리로 공원으로 지하철로 나서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에서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시원한 온정’을 보내면 어떨는지요? 품속의 큰 자를 꺼내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배려하는 세종의 마음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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