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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연구소공감]대표 :: 세종이야기꾼 :: 실록연구자 :: 소통 디자이너 :: 010-8014-7726 :: chewonoh@gmail.com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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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인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이번에는 세종시대의 외교에 대한 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3jk)

 

최근 미국의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The room where it happened)이 출간되며, 미국뿐 아니라 한국 정계에도 큰 파문이 일었습니다. 청와대에서는 '회고록의 사실 왜곡이 극심하다'는 의견을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측에 전했다고 알린 바 있는데요. 일반 대중들은 회고록을 통해 한미 외교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이를 한국 정부가 타개하려 어떻게 고군분투해왔는지 추측해볼 수 있었습니다.
 
이와 연관 지어, 600년 전 조선과 명나라 간에 이루어졌던 외교사에서 몇 가지 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기사에서 세종실록에 등장했던 '사람 조공'을 다룬 데 이어(관련 기사: "조선국에 가서 잘생긴 여자 몇 명 간택해 오라" omn.kr/1o05l), 이번에는 매 조공에 대해 들여다보겠습니다.

 

매사냥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기념우표. 출처 : 한국우표포털사이트

 

2010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매사냥은 삼국시대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매사냥은 생업의 한 수단일 뿐 아니라, '일응이마삼첩(一鷹二馬三妾)' 곧 '첫째 매 사냥, 둘째 말 타기, 셋째 첩 두기'라 하여, 당시의 '고급 유희' 중에서도 첫 번째로 치는 것이었는데요. 매가 사람 대신 하늘을 날아 사냥하기에, 지금의 아바타 게임과 유사한 재미를 선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조공을 바치는 일은 대충대충 할 수 없다... 하물며 황제의 칙명에 '짐이 조선을 대우함이 후한 편인데 어찌 매 바치는 한 가지 일을 아직까지 어렵게 여기는가'라고 하였으니, 그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명백하다." (세종실록 9년 8월 1일)

 
고려 때 매사냥이 가장 융성했고, 원나라에 사냥용 매를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명에 대한 조선의 외교로도 이어집니다. 조선 매는 영민함과 사냥 능력이 탁월하기로 유명했으므로, 명 황제가 매우 반기는 조공 물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직접 나서서 챙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원(圖畫院, 그림 그리는 일을 맡은 관청)에 명하여 각종 매를 그려 전국에 나누어 보내서, 그림에 의거해 매를 잡아, 중국에 공물 바치는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9년 2월 21일)
 
강원도 감사에게 임금의 뜻을 전하였다. "도의 각 고을에 나누어 기르는 참매 중에 몸집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것은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5일)
 
함길도(현재의 함경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초여름에 수컷 새매와 참매를, 품질이 좋고 몸이 커서 조공으로 바칠 만한 놈을 골라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1일)
 
충청도 감사에게 전하였다. "도에서 기른 조공용 수컷 새매 4연(連)을 밤의 서늘함을 이용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라." (세종실록 9년 7월 13일)

 
찍어낼 수 있는 공산품도, 심으면 수확할 수 있는 곡식도, 길러낼 수 있는 가축도 아닌 터라, 매의 확보는 변수가 큰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수령·감사·절제사에게 상시로 매를 잡아 서울로 보내도록 독려했습니다.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그들로서는 업무 과중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겠지요. 중앙 정부에서는 채방사(採訪使)라 하여, 지방의 실정이나 특산물을 조사하는 임시직 관리까지 파견하며, 매 포획을 도모합니다.
 

사헌부 장령(현재의 검찰·감사원에 해당하는 사헌부의 정4품 벼슬) 윤수미가 아뢰었다. "지금 조공으로 보낼 흰매를 잡는 일 때문에 채방사를 전국에 나누어 보냈는데... 다만 금년은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의 생계가 염려스러운데, 채방사를 나누어 보내면 어찌 백성들에게 폐해가 없겠습니까... (채방사를) 보내지 마시고 폐해를 제거하소서."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정흠지가 아뢰었다… "고려 말에 처음으로 처녀를 뽑아 (중국으로) 보내는 법이 생겼사오나, 그 폐단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하물며 해청은 포획이 매우 어려워서 이런 이유로 지방 백성들에 대한 민폐가 막심합니다."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매 사냥' 탓에 고통받은 민간, 그럼에도 세종의 염려는...

담당 공무원은 물론 민간에서도 매 포획에 따르는 고충을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성사대(至誠事大: 지극정성을 다해 사대함)의 기조 아래 세종은 신하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 잡기를 강행합니다. 조선 송골매는 해청(海靑) 또는 해동청(海東靑)이라 불리며 최고로 손꼽혔습니다. 따라서 명 황제는 물론 그에게 과잉 충성하는 사신들은 매 중에서도 특히 해동청 조공을 꾸준하고 거세게 압박해왔습니다.
 

찬성(조선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의 종1품 관직) 권진이... "해동청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만들어 황제께 아뢰시어 뒷날의 폐해를 막으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어허, 이 무슨 말인가. 사대는 마땅히 성심껏 하여야 할 것이며, 황제께서 우리나라에서 (해동청이) 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속일 수는 없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임금이 말하였다… "나의 궁 안의 심부름꾼과 환관도 많이 명나라 조정에 들어가서 (황제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일을 모를 것이 무엇인가? 내 이미 황제를 위하여 (해동청을) 잡았으니 즉시 바치지 않으면 내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려니와, 또 황제께서 '일전에 분부한 해동청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느냐'라고 이르신다면, 내 장차 무슨 말로 대하겠는가." (세종실록 10년 11월 11일)


세종은 매를 잡는 족족 명 황제에게 보내려 하지만, 신하들 의견은 다릅니다. 명에서는 매가 쉽게 잡히는 줄 알고 앞으로 더 많이 보내라 압력을 가할 것이므로, 매가 잘 안 잡힌다고 거짓말을 하고 잡은 매의 일부만 보내자고 주장합니다. 이에 대해 지성사대라는 명목을 들어 매 조공을 강행했지만, 세종에게 실은 두 가지 염려가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내밀한 정보라도 결국 명으로 새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혹여 거짓에 기반한 외교로 대했다는 사실을 상국(上國), 즉 조공 받는 큰 나라가 알게 된다면, 어떠한 불이익이 올지 모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해동청 조공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면 혹여나 (명에서)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폐해가 더욱 심할 것이다." (세종실록 11년 11월 16일)

 
세종의 두 번째 걱정은 명에서 직접 채방사를 보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는 괜한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명나라 사신 농간에 의해, 황제는 조선 접경지대로 군인과 사냥꾼을 대거 파견합니다. 해동청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우리 국토까지 헤집고 다닐 수 있기에, 조선 백성들의 피해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황제의 칙서에서… "이제 내시 창성·윤봉·장동아·장정안 등을 보내는데 (명나라) 관군 백오십 명을 거느리고 모련위(毛憐衛, 현재의 랴오닝·지린·헤이룽장 일대) 등의 지역에 가서 해동청·토표(스라소니) 등을 잡게 하겠다. 칙서를 받거든 (조선의) 왕은 곧 적당한 사람을 뽑아 보내서 호송하되... 사용되는 양식은 번거롭지만 왕이 공급하기를 바라며, 만일 날이 춥거든 쓰기에 알맞은 옷·신 같은 것과 아울러 잡은 해청·토표 등을 가지고 돌아오는 도중에 먹일 고기와 모이로 적당한 것을 왕이 또한 적절하게 마련해 주며, 사람을 시켜 국경에 나가기까지 호송하라." (세종실록 13년 8월 19일)
 
좌대언(임금 비서) 김종서를 내전(임금의 생활공간)에 불러들여 보고 말하였다... "(명에서) 짐승 잡는 군사를 많이 거느리고 와서 지나가는 고을에 민폐를 많이 끼칠 것이다. 올해에 이와 같이 하고 내년에도 이처럼 하여, 해마다 와서 우리 백성을 거듭 괴롭힐까 심히 두려우니, 이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은 이 뜻을 가지고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라." ... 그때 밤이 2경(밤 9~11시)이 넘었는데도 임금이 잠을 자지 못하고 어린 내시 인평만이 곁에서 모셨다. (세종실록 13년 8월 20일)

 
명에서는 파견할 사신·군인·사냥꾼의 식량과 옷, 그리고 해동청과 스라소니를 잡게 되면 그 먹이까지 우리에게 제공하라고 요구합니다. 본래 조선 북쪽 땅은 척박한데 그들 요구까지 들어주려면, 수령과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조선 공무원과 민간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가축 등을 수탈해 가는데 처벌은 받지 않아, 민심은 소요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올해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일어난다면 그 감당은 어찌해야 할까요.

세종은 현재의 NSC와 같은 회의를 소집해 대책 마련에 골몰하며,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합니다. 명 사신은 한술 더 떠서, 우리 땅인 함경도까지 와서 매를 잡겠다고 예고합니다.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임시 관직) 정연이 돌아와서 아뢰었다. "사신이 '내년 5월에 조선에 와서 6월에 머무르고 7월에 돌아가는데, 함길도에서 매를 잡으려 한다'라고 합니다." (세종실록 13년 12월 25일)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의 보편적 국제 질서에 따라 명과 형식적인 상하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조선이 명의 제후국이라는 외교 형식을 취하나 통치의 자주권은 인정됐습니다. 예컨대 조선은 명으로부터 내정 간섭을 받지 않고, 해를 세는 호칭인 연호(年號)와 왕의 인장인 국새(國璽) 등을 별도로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명에서 온 수백의 사신·군인·사냥꾼 무리가 조선 산과 들을 무자비하게 헤집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터전을 유린하는 일, 곧 국토에 대한 주권 침탈 행위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예조 판서(현재의 외교부 장관) 신상이 말하였다. "지난해는 사신 네 사람이 함길도에 와서 매를 잡았사온데, 올해에도 왔사오니, 어찌 뒷날에 또 오지 않을지 알겠습니까... 함길도에 비밀리에 분부하시어, 고의로 잡기 어려운 척 하고 잡았더라도 놓아버리라 하시어, 긴 앞날의 폐단을 없애주소서." ... 그 뒤에 경성(지금의 함경북도 경성군) 사람이 해동청 1연을 잡았으나, (사신 접대를 맡은) 이징옥이 일부러 놓아주었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이징옥이 아뢰었다. "소신이 어리석고 판단력을 잃어, 매의 수가 너무 많은 것이 싫어서 고의로 놓아 보냈습니다." ...(임금이) "내가 즉위한 이래로 사대의 일에서 조금도 거짓을 행한 것이 없는데, 이징옥이 큰일을 그르쳤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가." ... 좌의정(현재의 총리와 유사) 맹사성 등이 "매를 놓아준 것으로 죄를 다스린다고 말하면, (명 사신) 창성 등이 이를 듣고는 반드시 이전에도 이와 같은 거짓이 있었으리라 의심할 것입니다." …(의견이 분분하여) 밤은 삼경(밤 11~1시)을 향하는데, 임금이 아직도 궁궐에 앉아서 이징옥을 의금부(지금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가두도록 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18일)

 
잡은 매 일부러 놓아준 관료... 세종 "용서할 수 없다"

명 사신과 수행원들의 욕심이 과한 데다가 민간에 대한 행패도 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조선 국토와 국민을 유린하며 매를 잡으러 올까 염려한 현장의 관리는 잡은 매를 날려 보내다 발각되었습니다. 그간 쌓아온 지성사대에 대한 신뢰를 잃을 것이 염려되는 세종은 관리를 처벌하려 합니다.
 

의금부에서 이징옥의 죄를 심문하여 아뢰니, 직첩(관직 임명장)을 거두고 지방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14년 11월 20일)
 
(명 사신) 윤봉이 말하였다. "(이징옥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관대히 용서하시기를 비옵니다." 임금이 지신사(임금의 비서실장) 안숭선에게 명하여 답신하였다. "사신을 속인 일은 과연 하늘을 속인 것과 같으니 다른 잘못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신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내가 용서할 수 없노라." (세종실록 14년 11월 21일)

 
세종은 국방에 큰 공이 있어 신뢰하는 신하 이징옥이지만 황제의 명을 어기는, 즉 명과의 외교를 그르칠 수 있는 사건을 일으킨지라 귀양을 보냅니다. 이에 대해 사신은 어쩐 일인지 그를 처벌하지 말라고 청합니다. 자신의 과욕과 횡포가 개입된 이 사건이 황제에게 탄로날까봐 염려된 모양입니다. 그러나 세종은 예사 잘못이 아니라며 처벌을 강행합니다.

 

18세기 문인 화가 심사정沈師正의 그림 ‘토끼를 잡은 매 그림豪鷲搏兎圖’의 일부 확대.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임금이 말하였다... "(공녀를) 간택하는 즈음에도 백성에게 끼친 폐해가 막심했지만, 조공 바치는 일이 중대하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조치하였던 것이다. (매 조공의 폐해는) 이것과 비교한다면 만분의 일도 안 된다." (세종실록 9년 7월 28일)
 
"민간의 폐해를 나 역시 안다. 그러나 대의로 말할 것 같으면, 민간의 폐해는 가벼운 일이나, 사대를 성실히 하지 않는 일은 무거운 것이다." (세종실록 8년 9월 29일)


세종은 대표적인 애민(愛民) 군주로 꼽힙니다. 그런 그가 백성들이 입을 피해에 대한 고려보다 사대 의무의 수행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떠한 것이 진정한 국익 추구일까요? 과연 세종은 사대주의자였을까요?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일렀다. "근래 황제가 북쪽을 정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난번 안남(安南, 베트남)에 출정한 것은 황제의 실책이었다. 우리 동방(조선)을 생각하면, 땅은 메마르고 백성은 가난하며 상국(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므로, 진실로 마음을 다해 사대하여 한 나라를 보전하는 것이 마땅하다." (태종실록 14년 6월 20일)

 
당시 명은 적극적인 팽창 정책을 펼치며 1407년에 베트남을 정복했고, 몽골도 정벌하려 다섯 번에 걸쳐 황제가 직접 전장으로 나선 바 있습니다. 또한 '정화(鄭和)의 원정'이라 해 약 30년간 일곱 번이나 대함대를 파견하여 멀리 케냐 해안까지 정벌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은 명과의 관계에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즈음에 문재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지난 한국전쟁 70주년 기념사에서는 '세계사에서 가장 슬픈 전쟁을 끝내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자고 호소했습니다. 강대국 중심의 패권적 질서 속에서 '전쟁 없는 나라'를 향한 최고통수권자의 고뇌를 600년 시간을 사이에 두고 목도하게 됩니다.
 
(* 다음 기사에서는 명나라 사신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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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국면의 장기화에 따라, 예정돼 있던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는 요즘입니다.

제 생계에도 대중의 문화적 갈망에도 보릿고개가 들었습니다.

다행히 인문학 콘서트 [역사로 노닐다]는 처음부터 유튜브 생중계로 기획되어서, 랜선으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지난 7월 행사에는 관객을 열 분 모실 수 있었지만, 이달에는 사회적 거리두기의 강화에 의해, 완전히 스탭들로만 현장을 채웠습니다.

그래도 유튜브로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고 또 감사했습니다.

 

투입 대기 중. 두근두근하는 와중에도 '앙상블 IF'의 오프닝 연주가 정말 청아하고 좋았습니다.

두 달간 정약용과 그의 저작 속 생각을 만났습니다.

지난 7월에는 한신대 김준혁 교수님과 '목민심서와 리더십'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고요.

이달에는 경인교대 김호 교수님과 '흠흠신서와 법정의'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습니다.

정조와 다산이 꿈꾸었던 세상, 그에 따른 법의 역할과 범위, 코로나 장발장 등 최근 사건에서의 공정성 논의 등 약 600년의 시공간을 오갔는데요.

김호 교수님께서 차분하면서도 명료하게 정리해주셔서, 전공분야가 다른 제게도 참 많이 공부가 됐습니다. 

 

제 표정이 왜 저렇게 썩었는지... 아마도 살인 사건에 대한 말씀을 들을 때였나 봅니다.

행사 2주 전에 기획자, 김호 교수님과 함께 셋이서 사전 미팅을 했더랬습니다.

교수님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말씀에 매료됐었는데요.

그 부분을 최대한 살리고자, 교수님의 논문과 보조자료들을 읽고 원고를 작성했습니다.

유튜브로 만나신 여러분도 저와 같이 교수님의 매력, 다산에 대한 흥미, 현실세계에 대한 참여의식 등을 느끼셨기를 기대합니다.

 

리허설 때에도 철저히 마스크를 썼다지요. 방송에서는 저 답답하고 더운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관객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가 더욱 기운을 내야 했습니다.

들어주는 이가 없는 곳에서 강의나 발표 등을 하려면 정말 어색하거든요.

약 두 시간의 방송을 마치고 보니 이마와 등에 땀이 흥건하더라고요.

어서 코로나 국면이 진정되어, 다음에는 관객 여러분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눈맞춤하며 소통하기를 기원합니다.

 

* 일시 : 2020.08.26(수). 오후 04:00-05:50

* 장소 : 남양주시립박물관 (남양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다시보기 가능)

* 행사 : 온택트 인문콘서트 [역사로 노닐다 - 정약용,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爲民위민]

* 출연 : 연주 - 앙상블 IF

           강연 - 경인교대 김호 교수

           진행 - 실록읽어주는여자 오채원

* 기획, 연출, 사진 : 하정아

* 보도 : https://www.fnnews.com/news/202008222028194082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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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기사 중 일부이며,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된 바 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o05l)

 

(중국 진시황릉의 병마용, 즉 병사·말 형상의 부장품. 여기에서 용俑은 장례에 부장품으로 쓴 사람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람 순장을 대체한 것이다. 출처 : 연합뉴스)

황제가 죽자 순장된 궁인이 30여 명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였다. 식사가 끝난 뒤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하는 소리가 궁궐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매 죽게 되었다. (조선 여자) 한씨가 죽을 때 김흑에게 말하였다. “유모, 나는 가오. 유모, 나는 가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내어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세종실록 6년 10월 17일)

 

명나라의 제3대 황제인 영락제가 죽자, 후임자인 홍희제는 영락제의 후궁들을 함께 묻습니다. 저세상에 가서도 황제에게 봉양해야 하는 그들 중 한 사람인 조선사람 한씨의 유모 김흑이 생환하여, 순장되던 상황을 위와 같이 증언합니다. 실록 기사에 등장한 한씨와 최씨, 그들을 역사는 공녀貢女라 부릅니다. 여기에서 貢이란,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국가가 윗권력에게 바치는 물품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공녀는 사람이 아닌 것이지요. 원나라 때 활성화되었던 사람 조공은 국가가 명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왕이 먼젓번에 보낸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여자들은 모두 음식을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정성스럽고 아름다우며, 제조하는 것이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특히 정교하고 아름답다.” (세종실록 16년 12월 24일)

 

명의 제5대 황제인 선덕제는 조선에서 보낸 집찬비執饌婢, 즉 음식 만드는 계집종의 솜씨를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들 외에도 가무를 제공하는 창가비娼歌婢, 여러 잡무를 처리할 계집종, 그리고 황제의 후궁으로 삼을 양반가문의 아름다운 처녀를 명 황실로 보냈습니다.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이 황제의 명을 알렸다. “네가 조선국에 가서 국왕에게 말하여, 잘 생긴 여자가 있으면 몇 명을 간택해 데리고 오라.” 임금이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였다.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임금이 말하였다. “사대事大의 예禮를 내 감히 게을리 할 수 없어서 이미 처녀 다섯 명을 준비해두었다.” (태종실록 17년 5월 2일)

 

임금이 황제에게 보낼 처녀를 직접 간택하였다. (세종실록 8년 12월 9일)

 

사대 곧 큰 나라를 섬긴다는 외교 정책에 따라, 조선에서는 중국의 공식 및 비공식 요구에 성실히 응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처녀 조공인 것이지요. 영락제부터 선덕제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26년간 7회에 걸쳐 114명의 공녀를 보냈습니다. 세종시대만 따져보아도 임금이 직접 면접을 본 횟수가 16회나 될 만큼 황제에게 보내는 처녀의 선발은 국가 차원의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

 

(명나라 환관 겸 사신) 황엄 등이 의정부(국가 최고 행정기관)와 더불어 경복궁에서 전국의 처녀를 함께 선발하였다. 황엄이 처녀들 중에 미인이 없다고 노하여, 경상도로 왕이 파견한 환관 박유를 잡아다 결박하고 취조하였다......곤장을 치려다 그만두고, 교의(임금이나 3품 이상의 고위 관리가 앉는 의자)에 걸터앉아 정승을 앞에 세우고 욕을 보이고 나서 태평관(사신의 숙소)으로 돌아갔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의정부 대신에게 하대하며, 왕명을 받잡고 처녀를 고르러 지방으로 파견된 이를 직접 처벌할 만큼 명나라 사신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황제를 대행한다는 명목을 띠고 온 그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조선 정부에서는 조공할 처녀의 선발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으며, 다음과 같은 순서 및 기준에 따랐습니다.

 

진헌색(중국에 보낼 진상품을 마련하기 위한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계집아이를 모으고, 전국의 시집장가를 금지하였다......경차관(특수 임무를 주어 지방에 파견한 관리)을 각각의 도에 나눠 보내서 처녀를 뽑게 하였다. 공공 및 민간의 천민과 노예는 제외하고, 좋은 집안의 13세 이상 25세 이하 처녀를 모두 고르게 하였다......조금 뒤에 또 임금이 환관을 전국에 보내서 처녀를 간택하니, 전국의 민심이 흉흉하게 동요하여 몰래 혼인을 맺는 자가 매우 많았다. (태종실록 8년 4월 16일)

 

이날 (사신이 면접하는 자리에서)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행정안전부 격인 이조에 속한 정3품 관리)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군수품 관리 기관) 이운로의 딸은 다리에 병이 든 것처럼 절룩거리니, 황엄 등이 매우 노하였다. 헌사(현재의 검찰·감사원)에서 조견 등이 딸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물어, 아전을 보내서 도망 못 가도록 지켰다. 조견은 개령(현재의 경북 김천)에 이운로는 음죽(지금의 경기도 이천)에 강제 거주시키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실록 8년 7월 2일)

 

13세 이상 25세 이하의 ‘양갓집 규수’를 찾기 위해 전국으로 관리가 파견되자, 민심은 흉흉해지고 차출을 피하기 위한 온갖 방책이 등장합니다. 집안에서는 국가의 금혼령을 어기고 몰래 혼인을 시키기도 하고, 공녀 후보로 발탁된 여성들은 면접관 앞에서 신체 혹은 정신에 장애가 있는 양 행동합니다. 국법 혹은 왕명을 어겨 처벌을 받는 것보다, 말도 안 통하는 타국으로 보내져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붙이로 연명해나가는 일이 비교 안 될만큼 무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조용한 울음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 사신과 일곱 명의 처녀가 (경복궁의 동쪽 문) 건춘문에서 길을 떠나니, 그들의 부모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고 울면서 보냈으며, 구경하는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세종실록 9년 7월 20일)

 

세 사신이 (간택된 처녀) 한씨를 모시고......(명나라로) 돌아가니......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한씨의 행차를 바라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그의 언니 한씨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인데, 이제 또 (동생마저) 가는구나.”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산송장이라 하였다. (세종실록 10년 10월 4일)

 

앞서 보았던 영락제의 후궁 한씨가 순장당한 4년 뒤, 그의 동생마저 공녀로 차출되어 베이징으로 떠납니다. 그 누구보다도 지근거리에서 보았던 사건에 이제는 당사자가 되어 떠밀려 들어갑니다. 자신도 죽은 목숨이라 여겼겠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게 나라냐?’고요.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 정당화될 수 없어

 

(명나라) 사신 이충·김각·김복 등이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처녀 몸종 9명, 창가비 7명, 집찬비 37명을 거느리고 왔다. (세종실록 17년 4월 26일)

 

세종 17년인 1435년에 공녀 53명이 귀환한 후, 명 황실에 대한 처녀 조공은 한동안 중지되었다가 청나라로 전환된 뒤에 재개됩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예, 미군 주둔 시의 ‘양공주’로 재현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소수의 희생으로 국가를 유지했다고, 약소국의 외교란 그런 것이라고요. 그렇다고 하여 약자에게 자행한 정치경제적 폭력이 모두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국가 및 사회 차원의 거래라는 구조를 가리고, 개인의 선택 혹은 책임으로 돌리려는 시도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따라서 피해자란 없다고 주장합니다.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건 안하건, 피해 당사자에게 입을 다물도록 강요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정신대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재점화되었습니다. 특정 역사를 부정하려는 시도 또한 격렬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 사회가 현 사안을 회피한다면, 우리의 누이가 딸이 이웃이 유린당하는 일은 다시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공녀는 특수한 한 시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우리는 목도해왔습니다. 이번이야말로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아픈 역사를 직시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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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의 '실록 읽어주는 여자' 연재 기사로, 오마이뉴스 메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wws)

 

 

“내가 전에는 더위를 무서워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는 더위를 타기 시작했다. 이때 물에 손을 넣으면 더위가 저절로 풀린다. 이로 미루어 생각하건대, 죄수가 감옥에 있으면, 더위 먹기 쉬워서 어떤 이는 사망에 이르기도 하니,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더운 때가 되거든 동이에 물을 담아 감옥 안에 두고 자주 물을 갈고, 죄수로 하여금 손을 씻게 한다든지 하여, 더위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예전에 이러한 법이 있었는지 검토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30년 7월 2일)

 

때는 바야흐로 세종이 52세 되던 해입니다. 실록에는 날짜가 음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양력으로 환산하면 8월 초 즈음이 되겠지요. 열대야로 밤잠을 설치기 일쑤에, 불쾌지수가 높은 시기입니다. 이 한 여름에 세종은 ‘더위 무서운 줄 모르고 살던 나도 나이를 먹으니 더위를 탄다’고 토로합니다. 아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과 같은 건강 상태에서도 훈민정음 창제와 그 후속 작업들에 매진하며 체력이 고갈된 탓인 듯합니다. 게다가 코로나19 의료진의 레벨D 방호복만큼은 아니어도, 긴팔 옷을 여러 겹 껴입어 통기성이 떨어지는 복식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소박하게도 그는 더위 탈출 비법으로 얼음 깨먹기도 뱃놀이도 냉수마찰도 아닌, 물에 손 담그기가 최고라고 추천합니다. 이마저도 혼자 즐기기 미안했는지,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수감자 그러니까 사회 취약 계층에 해당되며, 고통을 호소해도 들어줄 데가 없는 이들입니다.

 

세종은 입으로만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교도소 안에 물동이를 두고 자주 물을 갈아주어, 손을 씻게 하자고 건의합니다. 죄수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인권·복지 차원의 개선안 혹은 해결책을 제안한 후, 이것이 일시적 시혜가 아니라 정책으로서 상시 운영되도록 법제화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참조할 과거 사례가 있는지 검토하도록 전문연구기관인 집현전에 명을 내립니다.

 

(형사 행정에 대한 풍속화를 엮은 《형정도첩刑政圖帖》 중에서 감옥 내부를 그린 그림.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 한 달의 검토 기간을 갖고, 현재의 시·도지사에 해당하는 전국의 감사들에게 명을 내립니다.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이 무척 구체적입니다.

 

1. 매년 (음력) 4월부터 8월까지는 감옥 안에 새로 냉수를 길어다가 자주자주 바꿔 놓을 것.

2. 5월에서 7월까지는 희망자에 한해서 열흘에 한 번씩 목욕하게 할 것.

3. 매월 한 차례 희망자에게 머리를 감게 할 것.

4. 10월부터 1월까지는 감옥 안에 짚을 두텁게 깔아 보온에 신경 쓸 것.

5. 목욕할 때에는 관리와 옥졸(간수)이 직접 점검하고 살펴서 도주를 막을 것.

 

유교의 기본 경전인 『대학大學』에 ‘혈구지도絜矩之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絜’은 ‘재다’라는 뜻이며, ‘矩’는 ‘곱자’ 곧 ‘ㄱ자 모양의 자’를 가리킵니다. 혈구지도를 직역하자면, 곱자로 무엇인가의 길이를 재는 방법이겠지요. 내 마음 속의 자로 다른 이의 마음을 재는 것, 즉 내 처지를 미루어서 남의 처지를 가늠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세종은 품속의 자를 수시로 꺼내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 같습니다. 한쪽 눈이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 만사가 귀찮은 더위 속에서도 말이지요.

 

(근무 교대 후 냉수로 더위를 식히는 선별진료소의 의료진. 출처 : 뉴시스, 2020-06-08.)

6월 초순인데도 낮에는 최고 체감 온도가 30도를 넘는 한 여름 날씨를 보입니다. 급기야 지난 9일에는 기상청에서 서울에 폭염주의보를 발효하고, 강릉·양양에는 열대야가 찾아왔습니다.

 

이날 인천의 한 워크스루Walk through 선별진료소에서 방호복을 입고 근무하던 간호사 세 명이 탈진해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방호복은 통기성이 낮은데다, 습기에 약해서 의료진은 더위에도 불구하고 얼음조끼조차 입을 수 없다고 합니다. 6월 11일자 YTN의 보도에 의하면, 레벨D 방호복의 내부 온도를 측정했더니, 평균 체온보다 높은 37.6도로, ‘1인용 사우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지경입니다.

코로나19가 수도권을 중심으로 확산 일로에 있습니다. 5개월간 고강도 근무를 이어온 의료진이 더위로 고생하는 기간이 더 늘어나지 않도록, 우리 개인은 위생에 주의해야겠습니다. 물론 마스크 착용은 더위를 가중시키지만, ‘1인용 사우나’를 입고 근무하는 분들을 떠올려야겠지요.

 

더위로 고통 받는 이들이 또 있습니다. 취약계층 어르신들입니다. 예년에는 동주민센터·복지관·경로당 등을 활용해 무더위 쉼터를 운영했으나,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휴관 내지 폐쇄된 상황입니다. 대부분 어쩔 수 없이 거리로 공원으로 지하철로 나서는 형편입니다.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에서는 대안을 제시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개개인도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시원한 온정’을 보내면 어떨는지요? 품속의 큰 자를 꺼내서, 나의 고통을 미루어 남을 배려하는 세종의 마음을 떠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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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가 메인에 게재된 2020.06.09. 오마이뉴스 대문)

(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일부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 omn.kr/1nv6c)

 

(양녕대군의 부모인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의 전경. 출처 : 문화재청)  

임금이 항상 세자를 올바른 도리로 가르쳤으나, 세자는 주색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임금의 가르침과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갑사甲士(군인)를 시켜서 문을 지켜, 허용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태종실록 16년 9월 24일)

 

태종은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꿈꿨습니다. 피의 역사는 자신의 세대에서 끝내고, 가문과 나라가 그 누구의 손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정통성 있는 인물을 세워 반듯하게 키워내자 마음먹었을 테지요. 장자 계승의 원칙에 부합하는 양녕대군을 정성들여 훈육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공부를 멀리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왕세자에게 걸맞지 않는 행동을 하기 일쑤입니다. 양녕의 주변인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협조합니다. 그저 두고만 볼 수 없는 학부모 태종은 아들의 인간관계마저 관리하게 됩니다. 15년간 세자의 자리에 있으며 태종의 후계자로서 위치를 공고히 다져가는 듯 보였던 양녕이지만, 결국 그는 왕이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양녕이 점점 퇴락해가는 과정을 학부모의 관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태종이 처음부터 양녕에게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본기가 갖춰져 있으니 교육을 잘 시키면, 자신의 뒤를 이어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될 자질이 충분하다고 보았습니다.

 

“세자가 어려서부터 체구가 당당하여 장차 학문이 무르익으면 국가를 맡길 만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항상 가르치고 인도하는 법에 힘썼다.” (태종실록 18년 3월 6일)

 

앞서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기사(본지 2020-05-12)에서 살펴보았듯이, 양녕은 태종이 무릎에서 내려놓을 사이 없이 애지중지 키운 맏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 건국에 이어 1·2차 왕자의 난, 조사의의 난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10년 안에 겪습니다. 자녀의 유년기에 태종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정치적 도박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격동의 시간을 보내며, 자연히 가정에 소홀해지기 쉬웠을 것입니다. 바깥일 한답시고 정작 가까운 이들을 챙기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이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이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태종

 

“예전에 이름나기 전에는 집안의 재물이 넉넉한지 여부도 모르고, 오직 말에 올라 세상을 변혁하는 일에만 열중하였다.” (태종실록 9년 1월 6일)

 

태종이 젊어서 세상을 구하려는 뜻이 있어서, 유교 경전과 역사책에 마음을 두고 재산 불리기에 힘쓰지 않았다. (태종실록 18년 11월 8일)

 

세자가 주상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주상께서 이를 보고 말했다. “내가 젊었을 적에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보니 배우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절도가 없다. 이제 임금이 되어서도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니, 자괴감이 든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자식은 자신보다 낫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요. 태종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보다 나은 교육 환경을 아들에게 제공하여, 자신보다 더 뛰어난 군주가 되기를 바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학습 태도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내가 세자에게 이와 같이 (엄격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오랜 번영[萬世]을 위한 계획에 의한 것이다......내가 세자에게 마치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와 같이 엄하게 하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임금이 세자에게 글을 외도록 명하니,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자를 보필하는) 환관에게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마땅히 서연관書筵官(세자의 선생님들)에게 벌을 주겠다.” 문학文學(세자시강원의 정5품 관직) 허조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세자가 밤에 참군參軍(정7품의 군인) 심보와 더불어 글을 읽고자 하였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임금이 세자로 하여금 읽은 글을 외게 한다고 하니, 세자가 이를 듣고 밤을 새워 글을 읽었다. (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이제부터 서연書筵(세자를 교육하는 자리)에 당직을 서는 관원은 세자가 식사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을 때에도 옆을 떠나지 말고, 장난을 일체 금하며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도록 하라. 세자가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바로 와서 보고하라.” (태종실록 6년 4월 18일)

 

임금이 지신사知申事(비서실장) 조말생에게 일렀다. “예전에 세자의 일로 사람들이 많이 감옥에 갇히고 어떤 이는 사형 당한 것을 내가 마음으로 지금까지 편치 못하게 여기고 있다.” (태종실록 17년 4월 16일)

 

훈육의 파장이 집안을 넘어 국가로

 

성리학을 확립시킨 주희朱熹가 『맹자집주孟子集注』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부모와 자식이 이어가는 것이 ‘일세一世(한 세대)’이며 통상 30년입니다. 그렇다면 ‘만세萬世’는 30만 년이 됩니다. 만세 곧 30만년 이어지는 국가를 꿈꾼 태종이기에 후계자를 엄격하게 훈육합니다. 시험을 보겠다고 하거나, 학습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선생님을 벌주겠다고 경고하는 초강수를 두니, 양녕은 그제야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효과는 그때뿐입니다. 세자의 태만과 비행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곤욕을 치르다, 감옥에 가거나 목숨을 잃는 이가 발생하기에 이릅니다. 아이 훈육의 파장이 한 집안을 넘어 국가의 범위로 확대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는 조부모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필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자녀 교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은 배제된 한국적 현실에 대한 풍자일 테지요. 이와 달리 태종은 적극적으로 관여합니다. 특히 임기 후반기로 가며 양녕을 국정에 참여시킵니다. 지금 식으로 보자면 OJT(On the Job Training, 입사 후 직무를 수행하며 교육을 받음) 혹은 인턴십에 해당할 것입니다.

 

임금에게 공무를 보고하는 자리에 세자가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태종실록 16년 5월 20일)

 

“군권과 인사권만 내가 행사하고, 모든 지휘·명령하여 시행하는 일은 세자와 함께 의논하라.” (태종실록 16년 5월 24일)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에서 중요한 것은 시야 확보입니다. 학습자·교수자·학부모가 동의하여 구체적 목표를 설정한 후, 그에 도달하면 학습자가 어떠한 이득을 얻게 될지 그려주어야 합니다. ‘깜깜이 공부’ 혹은 ‘닥치고 공부’가 아니라, 학습자에게 효능감이나 성취감을 맛보게 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정치를 직·간접으로 만나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부여하면, 양녕의 학습 의욕이 고취되리라 태종은 기대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국정 운영의 장에 앉히고 의사결정권을 일부 공유합니다.

또한 태종은 양녕을 명나라에 보내, ‘국가대표’로서의 무게를 체감하게 하고, 견문을 넓히도록 합니다. 양녕의 나이 15세 때의 일입니다.

 

세자 이제李禔를 보내 명나라의 서울에 갔으니, 새해맞이를 축하하기 위함이었다......임금이 예복을 갖추고 표전表箋(황제에게 전하는 서한)에 절하고 나서, 장의문(현재의 창의문)으로 나가 세자를 영서역(지금의 서울 은평구) 동쪽에서 전송하고, 세자에게 말하였다. “길이 험하고 머니, 마땅히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느니라. 왕세자이기에 너의 책임이 무겁다. 오늘의 일은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계책이니라.” 세자가 울면서 작별 인사를 하니, 임금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주위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종실록 7년 9월 25일)

 

태종은 왕자 시절인 태조 3년에 사신의 자격으로 명나라에 다녀옵니다. 이때 황제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고, 명나라 지식인들로부터 세자 이방석을 젖히고 ‘조선의 세자’로 불리는 등 정치적 동력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자신의 성공 경험을 태종은 아들에게 전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나 양녕은 명 황제의 환대를 받고 옵니다. 그 후부터 명 사신이 오면 ‘전담 마크’하게 하며, 양녕이 임금이 된다면 맞닥뜨릴 외교적 공간을 선제적으로 열어줍니다.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 안쓰러워

 

(선조 31년에 편찬한 군사훈련에 관한 책 『무예제보武藝諸譜』.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봄과 가을에 임금이 직접 참여하는 군사훈련인 강무講武를 실시했습니다. 『입시 교육의 실패자, 양녕대군』 편(본지, 2020-05-2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양녕은 사냥 및 유사 놀이에 관심이 많았기에, 보다 규모가 크고 역동적인 강무에 따라가기를 고집합니다. 그때마다 세자는 궁궐에 남아 공부에 힘써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발을 사기일쑤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 굳세고 과감하면 아랫사람을 통솔할 수 있고, 성격이 부드럽고 나약하면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체로 활쏘기와 말달리기는 굳세고 과감한 기상을 키우는 것이다. 지금 세자로 하여금 무예를 익히게 하는 것이 도리 상 어떠하겠는가?” (태종실록 9년 3월 16일)

 

태종은 임금에 걸맞은 진취적이며 강력한 리더십을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하며, 양녕이 무예를 익히도록 하고 강무에도 동행하도록 합니다. 군사력 통제를 바탕으로 하여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자신의 경험이 반영된 생각일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닮아 자유인의 피가 흐르는 아들이 궁궐에 갇혀 지내는 모양이 안쓰러웠겠지요.

 

(임금이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교東郊(동대문 밖)에서 매사냥하는 것을 구경하였다. 이날 새벽에 임금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사간원(언론기관)의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 송우가 아뢰었다. “지난번에 신들이 아뢴 바를 따르시어 가벼이 외출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늘 자못 신용을 잃었습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멋대로 놀려는 것이 아니다. 궁궐 안에만 오래 있으니, 기력이 좋지 않아서 잠깐 성 밖에 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태종실록 6년 3월 13일)

 

궁궐 안에만 있으려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여러 차례 몰래 밖으로 나간 전적이 있는 태종입니다. 이런 자신을 닮은 아들의 마음을 그는 알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강무를 비롯한 바깥나들이에 자신을 데려가라고 떼쓰는 아들 앞에서 번번이 마음이 약해집니다.

 

서연관(세자의 선생님)을 불러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므로 사냥하는 데에 따라갈 수 없으니, 서울에 남아 내 직무를 대행하라.” 라고 하였으나, 결국은 따라갔다. (태종실록 12년 2월 19일)

 

임금이 (황해도) 해주로 행차하고자 평주 온천에서 목욕한다고 핑계 삼았다. 세자와 여러 왕자들, (의정부) 우정승 조영무 등이 따라나섰다. (태종실록 13년 2월 4일)

 

통제원通濟院 남쪽 교외에서 머물렀다. 이날 아침에 세자에게 조정으로 돌아가도록 명하니, 세자가 따라가겠다고 무리하게 청했다. 그러자 임금이 여러 대신에게 말했다......“당초는 세자로 하여금 하룻밤만 지내고 돌아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지금 세자가 나를 좇아갈 수 없다고 섭섭해 하며 앙앙대고 밥을 먹지 않는다. 그는 나의 자식일 뿐 아니라 나라의 왕세자인데, 그 행동이 이와 같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이천우와 이숙번 등이 “이번에는 목욕을 위한 행차이니, 마땅히 전하의 수레를 따르게 하소서.” 라고 말씀을 올렸다. 임금이 “잠시 동안만 따르는 것이다.” 라고 하니, 세자의 얼굴에 기쁜 빛이 돌았다. (태종실록 13년 2월 5일)

 

예외의 남발은 교육 망치는 지름길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뻔히 알기에 매번 막을 수만은 없는 부모의 마음, 그리고 궁궐에 갇혀 지내는 동지로서의 동병상련이 발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의 남발은 교육을 망치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엄격해야 할 때와 너그러워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육의 원칙과 효과성은 점차 무너집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학부모의 권위와 서로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결국 감정적 대응만 남게 됩니다.

 

세자 이사世子貳師(세자시강원의 종1품) 유창, 빈객賓客(세자시강원의 정·종2품) 한상경·조용·변계량 등이 서연의 하급 관리를 거느리고 궁궐에 와서 아뢰었다. “신들이 재주가 없어서 잘 지도하지 못하여 전하의 노여움을 일으키고,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며칠간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금 전하가 편찮아서 모든 신하들이 분주히 안부를 여쭙는데, 세자만이 문안을 드리지 않으니, 나라 사람들이 어떻다고 생각할지 살짝 두렵습니다.”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의 비행이 밝혀지자) 임금이 사람을 시켜 세자에게 뜻을 전했다. “이제부터는 내게 오지 말라.” (태종실록 17년 3월 20일)

 

(양녕의 선생님인) 빈객賓客 등이 말했다. “(세자께서) 몸이 편치 않아서 강의는 쉬신다 해도, 내일은 전하께서 광주로 행차하시니, 병을 무릅쓰고라도 뵈러 가셔야 합니다.” 세자가 사약司鑰(궁궐 문의 열쇠 관리인)으로 하여금 임금을 뵈러 가는 길의 문을 열도록 요청했으나 열지 않았다......빈객 탁신이 정색하고 “이는 (주상께서 세자를) 개과천선시키고자 함입니다.”......세자가......끝내 뵙지 않았다. 임금의 수레가 밖으로 나가는 날이 되어, 서연관이 세자에게 청하였다. “바라건대 수레가 아직 대궐 밖에 나가기 전이니, 성상을 뵈러 가소서.” 세자가 내구문까지 갔으나 뵙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몸이 편치 않다면서 강의를 쉬고 해질 무렵에는 과녁을 쏘았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세자가 어리於里를 도로 받아들이고 또 아이를 가지게 했다는 소식에 임금이 노하여, 세자로 하여금 옛 처소에 머무르게 하고, 나와서 알현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18년 5월 10일)

 

(세종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부자 사이는 매일 서로 가까이해야 한다.’ 고 했다. 양녕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는 (부왕을) 뵈올 때 행동에 절도가 있었다. 그 후에 (양녕이) 잘못을 저질러서 뵈러 가지 못하니, 날로 부자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를 내가 직접 보았다.” (세종실록 20년 11월 23일)

 

학습에 태만하고 비행을 일삼는 양녕에 대한 태종의 실망이 점차 쌓여갑니다. 불호령을 내리는 아버지에 대한 양녕의 불만도 누적됩니다. 결국 부자는 서로 얼굴도 보지 않는 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는 사이에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태종의 눈에 들어옵니다.

 

(태종이) 경복궁에 행차해 상왕上王(정종)을 맞이하여 경회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재상을 비롯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푸니, 다투어 사람마다 한 구씩 시를 지어서 한 편의 시를 만들며 매우 좋아했다. ‘노련한 사람을 버릴 수 없다’는 말에 미치자, 충녕대군이 “『서경書經』에서 ‘노련하고 뛰어난 사람이 그 직책에 있다[耆壽俊在厥服].’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임금이 충녕의 학문이 두루 통한 것에 감탄하고, 세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너는 어째서 학문이 이만 못하냐?” (태종실록 16년 7월 18일)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 아니었다

 

남과의 비교는 도전 의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간혹 일시적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근원적 개선책이 될 수 없습니다. 잘 해낼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켜 긍정적이지 못한 자아상을 형성시키고,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동생 충녕과 비교당하며 양녕은 초조해지고 경쟁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개과천선에 이르진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태종은 양녕에 대한 교육 실패를 인정하고, 후계자를 교체합니다.

 

“제禔(양녕대군)가 세자였을 때, 담장을 넘거나 개구멍으로 나가서 몰래 외출하고, 강을 건너가서 몰래 소인배와 옳지 못한 짓을 멋대로 했다. 내가 계도할 수가 없어서, 진무소鎭撫所로 하여금 문을 지키고 통제하게 하였다. 지금 세자(충녕대군)는 그렇지 않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 있게 대하며, 성품이 온화하고 예의 바르며, 배우기를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는다......앞으로는 세자를 만나보고자 하는 자가 있거든 민간의 미천한 사람이라도 출입을 금지하지 말고 모두 들어가 만날 수 있게 하라. 마땅히 세자로 하여금 깊이 인심을 얻게 하는 것, 이것이 나의 뜻이다. 나는 세자 양육을 제에게 한 것과 같이 하지는 않을 것이다.” (태종실록 18년 6월 21일)

 

어떤 문제를 억제하면 또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현상을 풍선효과라고 합니다. 임시방편적 규제로 일관하면 결국 어디에선가 문제는 크게 터져버립니다. 태종은 양녕을 교육한 끝에 자각합니다. 교육의 내용과 방법도 중요하지만, 우선 아이에게 걸맞은 목표와 기대치를 얹어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양녕은 왕세자 교육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현재 우리의 입시지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적성에 맞지 않는 진로설계와 교육은 학부모도 학습자도 교수자도 괴로운 일입니다.

 

태종은 원점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장자 계승의 원칙도 15년간 양녕에게 쏟은 시간도 과감하게 내려놓으니, 다른 아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유교에서 중시하는 지도자의 덕목을 두루 갖춘 충녕은 셋째 아들이지만 왕세자로서의 자질이 보입니다. 태종은 세자를 교체하자마자 훈육 방침을 달리하겠다고 표명합니다. 충녕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녕에게 적용한 교육이 실패한 원인을 곱씹은 탓이겠지요. ‘자식 농사는 내 뜻대로 안 된다’지만, 씨앗에 적합한 땅에 심었는지, 물은 적절히 주었는지도 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양녕대군의 사당 지덕사至德祠.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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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 시리즈 중 양녕대군의 실패한 교육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q84)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師’를 ‘스스ᇰ ᄉᆞ’, 곧 ‘스승 사’라고 풀이합니다. 이 ‘스승’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여러 추정 중에는 불교의 사승師僧에서 왔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행자를 지도하거나 수행자가 존경하는 승려를 가리킨다는 것인데요. 이는 불교라는 종교색을 지우더라도, 현재 통용되는 ‘스승’의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스승이란 지식을 파는 노동자를 넘어, 상대의 정신적 성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이니까요.

그런데 ‘미래 권력’인 양녕에게 스승이란 없었던 모양입니다. 책상머리 공부를 즐기지 않는 양녕의 마음에 들려니, 선생님이 심지어 공부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조선 중기의 어린이용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박아내는 책판. 출처 : 문화재청)

(세자시강원의) 세자좌필선世子左弼善인 김주金稠를 파면하였다......“김주는......강의할 때 아부하고 아첨해서 세자에게 잘 보이는 것을 기쁨으로 삼으며, 세자께서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꼭 칭찬하여 교만한 태도를 길러주고......세자께서 『맹자孟子』를 읽을 적에, 날마다 50여 편을 외우니, 김주가 ‘그 뜻을 알면 한 번만 읽더라도 괜찮습니다. 어찌 이처럼 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며 말렸습니다.” (태종실록 7년 2월 3일)

 

세자빈객 이내李來와 변계량卞季良을 경연청經筵聽(임금을 위한 강습 기관)에 호출해,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명을 내렸다......“서연의 어리석은 선비들이 ‘(양녕이) 장차 임금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에 위축되어 쓴말을 하지 못하고, 대간臺諫(현 검찰·감사원·언론기관)도 그렇다. 그대들은 이미 재상이 되었는데, 무엇이 두려워 감히 바른 길로 (세자를) 인도하지 못하는가?”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사헌부司憲府(현재의 검찰 및 감사원)에서 상소하였다......“세자빈객 조용趙庸, 변계량......등이 바른 마음씨와 밝은 학문으로써 강의하지 않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무조건 ‘예 예’ 하고, 따라서 세자가 도리가 아닌 길에 빠지게 했습니다.” (태종실록 18년 6월 4일)

 

책 『삶을 바꾼 만남』에서는 황상黃裳이 정약용丁若鏞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일이 그야말로 ‘삶을 바꾼 만남’으로 그려집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몸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라는 존재의 무게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데요. 정치적으로 배척당하며 떠나온 고달픈 유배 생활 가운데, 자신을 진심으로 따르는 제자를 만나게 된 일이 정약용에게도 ‘삶을 바꾼 만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녕의 선생님들은 ‘팔자를 바꾼 만남’을 기대한 모양입니다. 15년간 공고했던 세자라는 양녕의 지위 앞에서 쩔쩔매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태종의 후광을 받아, 그의 맏아들에게서도 공고한 권력을 인식했을 것입니다.

 

조선은 태조-정종-태종에 이를 때까지 왕위 계승의 원칙에서 벗어난 임금이 배출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치 논리로 인해 여러 차례 혈육이 제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태종은 피의 역사를 끊기 위해, 적장자를 세워 ‘엘리트 코스’를 밟은 후계자로 길러내겠다는 의지가 강했으리라 추측 가능합니다.

 

양녕의 방탕함 고치고 싶었던 태종의 초강수

 

하지만 태종의 바람과 달리, 선생님들에게 미래 권력을 훈육하는 일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동생 충녕대군은 태종에게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이러한 양상이 양녕의 선생님들에게 위협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양녕 또한 충녕의 지적 우위를 의식하고 때때로 질투합니다.

 

(세자가 말하였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태종실록 14년 10월 26일)

 

(충녕과 시 짓기를 주고받으며) 임금이 기뻐서 “세자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였다. 세자가 예전에 임금 앞에서, 사람들의 학문과 무예에 대해 토론하다가 “충녕은 용맹하지 못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설령 용맹하지 못하더라도, 큰일에 직면했을 때 큰 의문점을 분별해내는 데에는 당대에 견줄 사람이 없다.” (태종실록 16년 2월 9일)

 

이때에 충녕대군이 배우기를 좋아하니, 세자빈객 이내와 변계량 등이 시기하여 여러 번 서연에서 충녕대군을 칭찬함으로써 세자를 분발시키고자 하였다. 변계량이 매번 충녕대군의 시관侍官에게 읽는 것이 무슨 글인가 하고 물어서, 무슨 글을 읽는다고 대답하면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태종실록 16년 9월 7일)

 

선생님들은 충녕의 학습 수준과 태도를 칭찬하며 양녕의 경쟁심을 부추겨 봅니다. 그러나 이 충격요법도 그다지 효과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체로 경쟁자를 이기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나의 실력을 키우거나, 상대를 깎아내려서 위안을 얻는 일명 ‘정신승리’를 들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양녕은 후자를 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이 충녕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점을 부친 앞에서 불쑥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지요.

시간이 지나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고, 심지어 선생님이 양녕의 반성문까지 대신 써줍니다. 자기소개서 대필, 수행평가 대행 등을 해주는 요즘의 일부 학원·과외 선생님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세자가 종묘에 아뢰니, 그 글은 이러하였다......“아뢴 뒤 (개과천선하겠다는) 이 말에 변함이 있으면, 조상의 영혼께서는 반드시 벌을 내려 (저를) 용서하지 마소서.” 또 주상께 글을 올렸는데......“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저를)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에 올린 맹세와 주상께 올린 글은 모두 빈객 변계량이 지은 것이었다. (태종실록 17년 2월 22일)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겠다고 이미 하늘에 맹세까지 한 바 있건만, 양녕의 비행은 반복됩니다. 여성 스캔들이 잦았던 양녕이 이번에는 남의 첩인 어리於里라는 여성을 궁궐로 몰래 데려옵니다. 이 사건은 후일 폐세자가 되는 도화선이 되는데요.

태종은 이번 기회에 양녕의 방탕함을 고치고 싶어 합니다. 양녕을 장인 김한로의 집으로 보내고, 궁중에서 지급하던 양식을 끊도록 명령을 내리는 등 초강수를 둡니다. 요즘으로 보자면, 집에서 쫓아내고 신용카드를 정지시키는 것과 비슷할까요?

 

임금은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

 

태종의 의중을 파악한 세자시강원의 선생님들은 양녕에게, 종묘에 모신 조상들께 반성문을 올림으로써 아버지에게 강한 개선의 의지를 보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반성문의 작성을 양녕은 선생님에게 떠넘깁니다. 양녕도 선생님도 ‘이번만 무사히 넘기자’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1년 정도 지내던 양녕은 또 다시 여성 스캔들을 일으키고, 이를 지적하는 아버지에게 대듭니다.

 

세자가 환관 박지생을 보내 직접 쓴 손 편지를 (태종께) 올렸는데, 사연은 이러하였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귀중하게 여겨 받아들이십니까?” (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놀라서 몸이 움츠러들고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싶구나.”......“이 아이는 마음을 고치기 어렵다. 그 말의 기세를 본다면 양녕이 정치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재앙이 될 지 복이 될 지 예측하기가 어려우니......서연관으로 하여금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말하고, 서연에 나오게 하여 잘 성장시켜야 마땅하겠다. 이와 같이 해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선례에 따라 처리하겠다.” (태종실록 18년 6월 1일)

 

의정부議政府(조선 최고 행정기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공신들, 육조六曹(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여섯 부서),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모든 군사를 관할하는 기관), 한양 모든 관청의 관리들이 글을 올려, 세자를 파면하도록 청하였다. (태종실록 18년 6월 2일)

 

양녕은 ‘아버지도 여성 편력이 있으면서 어째서 자신만 탓하느냐’고 정면으로 맞섭니다. 이는 단순히 한 사안에 대한 이의제기나 불평을 넘어, 현재 권력에 대한 미래 권력의 도전으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아울러 임금은 어쩔 수 없이, 사적 개인에 그칠 수 없는 공적 존재입니다. 설령 개인적 판단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해도 그 파급은 국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태종이 사사롭게는 양녕에게 아버지이지만, 동시에 국가의 명운을 책임져야 하는 정치인입니다.

이는 국가의 공식적 2인자로 정치적 존재가 되어버린 세자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입니다. 따라서 권력을 남용해 국가의 공적 조직이나 조직원을 사익 추구에 사용하거나, 국정에 개입하려는 사사로운 무리를 방조하여 ‘비선 실세’의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양녕대군,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

 

여기에까지 생각이 미친다면 태종은 후계자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再考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미 1·2차 왕자의 난, 처가인 여흥 민씨 일가의 처단 등과 같은 사건을 통해, 한때 동지였던 혈족 및 친인척을 정치적 혹은 생물적 사망에 이르게 한 바 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자신의 아들도 정치적 맥락에서 재단해야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태종 입장에서 임계점에 다다른 것은 물론, 나라의 여론도 양녕의 편이 아닙니다. 국정 운영에 관여하는 상급·하급 공무원들이 세자의 파면을 요구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양녕의 선생님들도 더 이상은 막아주지 못합니다. 이제는 그들도 세자 교체를 요청하는 여론에 합류합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정과 도리는 비정한 정치 논리와 공적 시스템 속에 매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양녕의 세자빈객 곧 선생님이었던 변계량은 두 달 후, 세종의 지경연사知經筵事로 자리를 옮깁니다. 지경연사는 임금이 고전과 동시에 국정을 토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정2품 관직입니다. 세자의 선생님에서 임금의 선생님이 되었으니, 영전榮轉을 한 셈입니다. 그 후 변계량은 약 20년간 국가의 학문을 상징하는 ‘문형文衡’으로서, 세종의 주요 국정운영 동반자가 됩니다.

 

양녕대군은 이카로스Īkaros처럼 태양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습니다. 단종 복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권력을 재추대하고자 하는 무리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사자를 사전에 제거해버리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세종 6년에, 양녕이 왕이 됐으면 세상이 더 좋아졌을 것이라는 불충한 말을 한 향리들, 양녕이 군사력을 장악하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군인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세종이 보호해주어 양녕은 세종보다 장수하지만, 통상적으로 ‘폐세자=사망’이라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제자) 안연이 죽자, 공자가 말하였다. “슬프다!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안연이 죽자, 공자가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따르던 제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은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내가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안연을 위해 슬퍼하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동양 고전의 교과서 격인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안연이 사망하자 통곡합니다. 어찌나 비통해 하는지 다른 제자들이 서운해 할 정도입니다. 이에 비해, 양녕의 선생님들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제자를 위해 진정 통곡했는지 의문입니다. 정치 논리 앞에서는 마음으로 울어주는 사제 관계는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는 학부모 태종의 학습 방침이 확고하지 못한 이유도 있어 보입니다. 이번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양녕에 대한 태종의 교육법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양녕대군의 선생님 중 한 사람인 변계량의 문집 『춘정집春亭集』. 출처 : 국립전주박물관)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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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읽어주는 여자'는 세종이야기꾼 오채원이 매주 오마이뉴스에 연재하고 있는 시리즈입니다. 기사 바로 가기 omn.kr/1nooz)

 

임금(태종)이 일찍이 충녕대군(이후 세종)에게 말하였다. “너는 할 일이 없으니, 평안하게 즐기기나 하여라.” 그리하여 서화書畫(글과 그림), 화석花石(무늬 돌), 금슬琴瑟(서로 짝을 이루는 현악기) 등 모든 놀이의 내용을 갖추지 않음이 없었기에, 충녕대군은 예술에 정통하였다. (태종실록 13년 12월 30일)

 

태종은 왕자시절의 세종에게 ‘방목형 교육’을 제공합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태종의 자상해 보이는 말은, 왕이 될 가능성을 ‘꿈도 꾸지 마라’는 셋째 아들에 대한 경고였던 셈입니다. 덕분에 세종은 예술을 기반으로 한 ‘자기주도적 학습’으로 청소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하여, 양녕대군은 11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이후, 가업 승계 교육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종에 이어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맏아들의 숙명이었지요.

 

태종은 34세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바 있습니다. 제2대 임금인 정종이 자신에게 적자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동생인 정안공靖安公(이후 태종)을 후계자로 지목한 것인데요. 정종실록을 보면, 정안공이 세자의 자리에 있었던 기간이 9개월 남짓인데, 그나마 교육받은 횟수는 3회밖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태종이 고려시대에 문과 급제한 엘리트라 해도, 그가 접한 학습은 공무원의 직무에 한정된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세자 교육의 부족을 체험하고, 자신의 후계자는 체계적으로 양성하리라 다짐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세자를 위한 교육제도이자 교육장인 서연書筵, 세자 교육을 맡은 관청인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여기에서 교육을 수행할 세자사世子師(정일품正一品, 의정부 영의정 겸직) 및 세자부世子傅(정1품, 좌·우의정 중 1인 겸직), 세자이사世子貳師(종1품, 찬성이 겸임), 세자빈객世子賓客(정·종2품), 보덕輔德(종3품), 필선弼善(정4품), 문학文學(정5품), 사서司書(정6품), 설서設書(정7품) 등을 두었는데요. 현재 1인자의 맏아들이자 미래의 1인자를 길러내는 일이므로, 변계량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선생님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양녕대군에 대한 세자 교육은 실패로 끝납니다.

현대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주체를 대체로 학습자·학부모·교사로 봅니다. 양녕의 교육이 실패로 끝난 이유를 이 세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가문의 영광’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지다  

양녕대군은 임금이 갖추어야 할 지식·태도·역량의 함양이라는 단일한 목표를 향한, 그리고 본인의 선택과 무관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입시 지옥’에 빠진 수험생과 같다고 할까요? 차이가 있다면, 경쟁자도 동료도 없으며, 합격은 ‘떼어 놓은 당상’인 점일 것입니다. 그러니 학습에 대한 동기부여가 부족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양녕은 대체로 책상 앞에 앉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 보입니다.

 

임금이 글을 외우도록 명했는데 세자가 외지 못하였다. 임금이 (양녕의 시중을 드는) 환관의 종아리를 때리고 명을 내렸다. “나중에도 이와 같으면 반드시 서연관을 벌하겠다.” (세자시강원의) 문학 허조許稠를 시켜 이 말로써 세자에게 경고했다. (태종실록 5년 9월 14일)

 

사간원司諫院(왕권을 견제하는 언론기관)에서 상소하였다......“신들이 일전에 서연 일기를 보니, 닷새 동안에 잇달아 경전 해석한 날이 적습니다.” (태종실록 12년 5월 19일)

 

세자가 팔뚝에 매를 받치고 궁궐 문 밖으로 나가고, 또 아프다며 핑계대고 강의를 듣지 않았다......세자가......“내가 병이 있으니 회복되면 저녁에 당직하는 서연관과 함께 복습을 하겠다.” 라고 말하였으나, 저녁이 되어도 그대로 하지 않았다. (태종실록 16년 10월 21일)

 

(매 사냥꾼을 찍은 1930년 사진. 출처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역사아카이브)

양녕대군의 장래는 태종을 이어서 보위에 오르는 오로지 한 길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양녕에게 한 편으로 큰 혜택이지만, 또 달리 본다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를 해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건강한 현실 감각을 가졌다면, 양녕은 한정적 환경 내에서도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의욕이 있으면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도전하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녕은 복습을 한다거나 몸이 아프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를 들어 종종 강의에 결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태종에게 알려져서, 자신을 보좌하는 환관이 대신 매를 맞거나, 스승들이 파면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양녕은 잠시 조심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사냥 등의 유희에 탐닉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기 일쑤입니다. 신하들이 말려도 몰래 사냥을 나갔던 태종의 기질을 양녕은 일부 물려받은 모양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세자의 천성을 보아하니, 틀림없이 사냥을 좋아한다.” (태종실록 15년 10월 17일)

 

세자가 보덕 조서로에게 “내가 활을 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조서로가 “대군의 상제가 이미 삼칠일을 지났으니 쏠 수 있습니다.” 하여, 세자가 내사복문內司僕門 밖으로 나가서 230여 보步를 쏘았다. (태종실록 18년 2월 28일)

 

우빈객 계성군 이내李來 등이 나아가 말하였다. “음악과 여색, 매와 개는 마땅히 멀리하고 끊어야 합니다. 요즘 듣자하니, 저택 안에 연주자를 끌어들여 거문고를 타고 피리를 불고, 또 매 2련連을 두셨다 합니다. 이 말이 밖에 들리면 저하가 공부한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태종실록 11년 10월 17일)

 

양녕은 어찌나 사냥을 좋아하는지 그와 유사한 놀이도 즐겼는데, 심지어 친동생인 성녕대군이 사망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애도하기보다 활을 쏘러 나갑니다. 사냥에 쓰이는 매와 개 기르기, 그리고 그 외의 온갖 유희에 탐닉합니다. 여성편력으로 인해 부모님의 걱정을 사기도 하지요.

 

사헌부에서 아뢰었다. “동궁東宮(세자의 궁) 북쪽 담 밑에 작은 지름길이 있으니, 반드시 몰래 숨어서 드나드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동궁의 어린 환관을 불러들여 국문하게 하니, 과연 예빈시禮賓寺(왕실 잔치 등에 음식 공급을 맡은 관청)의 종 조덕중......등이 몰래 평양 기생인 소앵을 동궁에 바친 지 여러 날이 되었다.......세자가 밥을 먹지 아니하니, 정비(모친 원경왕후)가 환관을 시켜 세자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리지도 않은데 지금 어째서 부왕께 이와 같이 노여움을 끼치느냐?” (태종실록 13년 3월 27일)

 

양녕대군에게 부족했던 이것  

‘개구멍’까지 파고 궁 안으로 기생을 들여온 사건이 발각됩니다. 이 지경이 되자, 아들 셋을 잃고 난 뒤에 얻은 아들이라 양녕을 애지중지해온 모친이라도 두고만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양녕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단식투쟁’을 벌입니다. 이러한 양녕의 절제·사유·성찰 없음은 추후 세자에서 폐위되는 빌미가 됩니다.

 

옛 사람들에게 성찰은 공부의 시작점이자 종착지였습니다. 보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바로 잡도록 스스로에게 촉구했습니다. 단순한 지식 충족에 그치지 않고, 부끄러움을 아는 윤리적 자아를 갖추는 것이 공부에서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통수권자인 임금에게도 전문적으로 비판을 가하는 사간원이라는 언론기관을 두었고, 관직에 오르지 않은 학생, 더 나아가 유식하지 않은 ‘풀 베는 촌부와 나무꾼’, 즉 백성의 의견도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오류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개발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적 교육학의 관점에서도, 공부의 목적은 보다 나은 자신으로의 변화 혹은 성장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는 태도, 또 주변의 조언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양녕에게서 부족해 보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세자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은 (혼난 후) 분함을 이기지 못해서이다......세자의 불손한 마음은 세자라는 자신의 자리를 지나치게 믿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만약 뉘우치지 않는다면, 왕족 중에 (세자로) 적당한 사람이 어찌 없겠는가?” (태종실록 13년 8월 15일)

 

세자가 말하였다. “요즘 내가 아무 일도 한 것이 없는데, 주상께서 진노하신 이유를 아직 자세히 모르겠다.” 세자빈객 이내李來가 말하였다. “바로 그것이 저하가 가진 나쁜 병의 원인입니다. 저하의 뱃속에 가득 찬 것은 모두 사사로운 욕심뿐입니다......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 줄 아십니까?” (태종실록 15년 1월 28일)

 

세자가 말하였다. “(태종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과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서이다.” (태종실록 17년 3월 23일)

 

양녕은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는 질책·비판·우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남을 탓합니다. 밖에서는 양녕의 외줄타기가 위태로워 보이나 이를 자신만 모르는 듯합니다. 태종과 선생님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은 세자라는 자신의 지위가 언제까지나 확고하리라 믿었기에 마음공부를 게을리 한 것 같습니다. 세자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이에 따른 의무의 균형을 모르는 양녕의 패착은 다음과 같이, 선생님들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도 있어 보입니다.

 

(양녕대군의 교육 실패에 있어서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글씨에 능했다고 전해지는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숭례문’ 목판. 출처 : 문화재청)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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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정~말 오랜만에 선 무대.

온택트 인문콘서트 [역사로 노닐다 - 정약용,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 淸廉청렴]을 성황리에 마쳤습니다.

 

우선, 정가 보컬리스트 하윤주님의 공연으로 문을 열었는데요.

그날의 주인공이 다산 정약용 선생인만큼, 다산의 시 일부를 정가로 창작하여 들려주었습니다.

'정가 여신'이라는 별칭답게 청아하면서도 우아한 목소리와 무대매너로, 투입 대기 중인 저마저도 설렜더랬습니다 :)

 

이어서 역사학자 김준혁 교수님과의 강의+토크+질의응답을 한 시간 반 가량 진행했는데요.

정조와 다산 전문가답게 말씀이 유려하고 어떠한 질문에도 여유롭게 답해주셨습니다.

게다가 파트너를 편안하게 배려해주시는 교수님의 인품에 반했고요.

그간 방송에서 뵈어온 모습과 실제가 똑같은, 참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었습니다.

(교수님, 또 뵈어요^^)

 

[역사로 노닐다]는 제가 지금까지 진행한 프로그램 중 관객이 가장 적으면서 또 가장 많은 공연이었을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사전 예약자 열 분만 현장에 모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남양주시 유튜브로 생중계해서, 테이블에 놓인 아이패드로 많은 분들의 호응과 질문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답니다.

 

제 주요 전공이 다산이 아니라 자료들 찾으며 공부하고, 김준혁 교수님과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터라 교수님의 영상을 많이 찾아보며 이날을 준비했더랬습니다. 

사고 없이 마치고, 현장 분위기도 좋아서,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이날의 교훈 : 미용실에는 꼬옥 다녀오자;;; 시간이 허락하질 않아서 그냥 머리 질끈 묶었는데, 나중에 영상을 보고는 울고 싶었습니다ㅜ.ㅜ)

 

* [역사로 노닐다] 관련 기사 :

http://www.k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34867

 

Posted by 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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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갓!

오마이뉴스에서 상을 주셨습니다!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요(제가 해석하기론 '이달의 신인 기자상'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제 글에 '좋아요' 꾸욱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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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채원 시민기자는 <실록 읽어주는 여자>라는 연재를 통해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을 현대인의 눈높이에 맞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자신을 "사람들이 저마다의 세종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공감의 역동을 선사하는 세종이야기꾼"이라고 밝힌 오채원 시민기자를 2020년 5월 이달의 새뉴스게릴라로 선정합니다.

 

"굶어 죽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 http://omn.kr/1nhia
아들아, 모든 업보는 내가 지고 저세상으로 가마 http://omn.kr/1nk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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